[스크랩] 父와 富 父와 富 이현숙 종이를 만들던 아버지는 닥나무를 지고 골목 어귀에서 깊은숨을 고르셨다 목을 길게 빼고 지팡이를 짚으며 부(富)를 더듬거리는 길이었다 밤새도록 어머니와 아버지는 닳은 관절 위에서 뭉툭한 칼로 닥나무 껍질을 벗기셨다 껍질이 벗겨 나가고 속살이 훤히 드러난 만큼 .. 시가 있는 아침 2017.12.05
마음의 창 열고보니 내게 있는 내 마음 내가 주인인 줄 알았던 내 속에 있는 내 마음 눈에 보이지 않음으로 손에 잡히지 않음으로 마음이 가는데로, 마음이 행하는데로 멍~하니 바라보다 화들짝 놀라기도 하는 그것, 마음. 마음의 窓을 열기보다 가까이 보이는 입이 먼저 열리고 작은 소리까지 들리는 귀가 먼.. 시가 있는 아침 2017.07.15
잃다 잃 다 이 현 숙 삭풍은 불고 날은 저문다 밤새 허물어진 공장 터엔 길 잃은 비둘기 서성거리고 양동이 가득 노란 머리 터번 속에 숨기듯 검은 천으로 싸맨 채 트럭 뒤 칸에서 팔려가던 콩나물, 중년의 남자가 가졌던 새벽이 사라졌다 치매 노모와 나이 차 많은 젊은 아내와 늦둥이 아들은 .. 시가 있는 아침 2016.12.28
북회귀선에서 온 소포 북회귀선에서 온 소포 허 연 때늦게 내리는 물기 많은 눈을 바라보면서 눈송이들의 거사를 바라보면서 내가 앉아 있는 이 의자도 언젠가는 눈 쌓인 겨울나무였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추억은 그렇게 아주 다른 곳에서 아주 다른 형식으로 영혼이 되는 것이라는 괜한 생각을 했다 당신이 .. 시가 있는 아침 2015.12.03
칼싸움 [시가 있는 아침] 칼싸움 칼싸움 - 이정록(1964~ ) 절에 갔다가 아빠랑 화장실에 갔다. 깊고 넓은 똥 바다 꼬추를 조준해서 아빠의 오줌 폭포를 맞혔다. 칼날이 부딪는 것 같았다. 아빠도 재밌는지 내 오줌 줄기를 탁탁 쳤다. 옆 칸이라 안 보이지만 아빠 꼬추도 삐뚤어졌겠다. 아빠 손에도 오.. 시가 있는 아침 2012.08.24
새벽부터 내리는 비 새벽부터 내리는 비 - 김승강(1959~ ) 비야 내려라 억수같이 내려라 억수같이 내려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는 누이의 발길을 돌려놓아라 새벽에 꿈결에 깨어 어 비가 오네 하고 미소 지으며 달콤한 잠 속에 빠지게 해라 비야 노동판을 전전하는 김 씨를 공치게 해라 무더운 여름 맨몸으로 햇빛.. 시가 있는 아침 2012.07.05
나무의 철학 00:58 전나무 Abies holophylla 나무의 철학 조병화(1921~2003) 살아가노라면 가슴 아픈 일 한두 가지겠는가 깊은 곳에 뿌리를 감추고 흔들리지 않는 자기를 사는 나무처럼 그걸 사는 거다 봄, 여름, 가을, 긴 겨울을 높은 곳으로 보다 높은 곳으로, 쉼없이 한결같이 사노라면 가슴 상하는 일.. 시가 있는 아침 2011.11.14
갈 대 품종 Cortaderia selloana 갈 대 - 신경림(1936~ )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시가 있는 아침 2011.09.20
엄마와 이름 엄마와 이름 장 대 규 여든 넘은 울 엄마 여태, 이름이 없다 젊었을 땐 어쩌다 내 이름에 대답하고 늙어서는 친정따라 택호가 이름인 듯 하더니 이제는 내 이름도 잊어버려 동생도 나도 모두가 '야야' 이다. ----------------------------------------------------------------------------------------------- 흰옥양목 치마에 같은 .. 시가 있는 아침 2011.09.09
나는 순수한가 나는 순수한가 박 노 해 (1958~ ) 찬 새벽 고요한 묵상의 시간 나직이 내 마음 살펴보니 나의 분노는 순수한가 나의 열정은 은은한가 나의 슬픔은 깨끗한가 나의 기쁨은 떳떳한가 오 나의 강함은 참된 강함인가 우주의 고른 숨 소스라쳐 이슬 떨며 나팔꽃 피어나는 소리 어둠의 껍질 깨고 동터오는 소리 --.. 시가 있는 아침 2010.0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