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새벽부터 내리는 비

여디디아 2012. 7. 5. 11:59

 

새벽부터 내리는 비

 

- 김승강(1959~ )


 

비야 내려라 억수같이 내려라

억수같이 내려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는 누이의 발길을 돌려놓아라

새벽에 꿈결에 깨어 어 비가 오네 하고

미소 지으며 달콤한 잠 속에 빠지게 해라

비야 노동판을 전전하는 김 씨를 공치게 해라

무더운 여름 맨몸으로 햇빛과 맞서는 김 씨를 그 핑계로 하루 쉬게 해라

비야 내 단골집 철자의 가슴속에서도 내려라

아무도 모르게 가슴속에 꽁꽁 감추어둔 철자의 첫사랑을 데려다 주어라

비야 내려라 내려도 온종일 내려 세상 모든 애인들이 집에서 감자를 삶아 먹게 해라

비야 기왕에 왔으니 한 사흘은 가지 마라

그동안 세상 모든 짐은 달팽이가 져도 충분하게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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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인듯,

이미 오래전에 헤어진 옛 애인인 듯..

머리가 하얗고 정신이 가물가물한 친정엄마 발걸음인듯..

긴 여행에서 피곤한 몸으로 돌아온 아들 녀석인 듯..

 

새벽녁에 들리는 빗소리는

정다운, 사랑하는, 잊혀진,

누군가의 발길이 나를 향한 것같아 두근거렸고

반가웠고 설레었다.

 

새벽에 깨어

'어~ 비가 오네'  

라고 입술을 열었던 때가 마치 먼먼 옛일처럼 느껴져

떨어진 살비듬을 털어내지도 않고

끼인 눈곱도 털지 못한채

창문밖에서  풍성하게 내리는 빗줄기에 마음을 묶고

아무래도 부족하여 천사의 향기처럼 달큰한 커피 한잔을 들었다.

 

뜨거운 햇볕아래 검게 그을린 김씨를 공치게 하고

세상 모든 애인들이 감자를 삶아먹게 하라...

 

이렇게 따뜻한 마음이 빗속에 숨었을까.

이렇게 감미로운 마음이 빗줄기에 씻어질까,

 

죽죽 그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감자를 삶아 먹고

책을 읽다 잠이 들어도 좋겠다.

읽다만 페이지에 침이 흘러도 좋겠고

한장쯤 구겨진대도 용서하리라.

 

사흘쯤 내리내리 비가 내려도 좋겠다.

내 짐까지 달팽이가 지고 가지 않는다고 해도 탓하지 않으리라.

 

그립고 반가운.. 비다.

 

(진옥이의 한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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