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가라, 서커스
지은이: 천 운 영
출판사 : 문학동네
상처도 사랑이라고 담담하게 고백하는 여자 천 운 영,
내가 그녀를 만난 것이 언제였더라.
어느 문학상 수상집에서 본선까지 진출했던 그녀의 글을 읽은 후, 천운영이라고 쓰여진 작품마다 끌어당겼다.
교보문고에서 천운영의 신간소식을 듣고 곧바로 달려가 구입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 당연한 이 때문에 가끔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할 때가 있다.
내가 알던 작가가 영 아닌 글로 불쑥 얼굴을 내밀었을 때,
가차없음으로 뇌리에서 지워버리는 매몰찬 구석도 있다.
그래서 두렵기도 하다. 새로운 글을 읽을때면.
행여 나를 실망시키면 어쩌지.
그리하여 나로하여금 또 한명의 작가를 내게서 매장시키면 어쩌지..라고.
기우였다.
지금껏 알고 있던 천운영의 깊은 면을 발견하게 되어
늦가을날 선물이라도 한아름 받아든 것 같다.
나이가 들도록 결혼을 하지 못한 남자는 결국 조선족 여자를 데려오기 위해 중국 훈춘으로 맞선을 떠난다.
어릴적부터 서커스를 좋아하던 형은 동생과 가족들 앞에서 물구나무서기를 좋아하고, 그런 자세로 걸어다니기도 하고, 위태로운 나뭇가지에도 날듯이 오르기도 한다.
달리는 차를 쫓으며 오토바이에서 묘기를 부리던 형이 어느날 전선줄에 목이 감겨 부상을 당하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목소리를 잃어버리게 된다.
쉰듯한, 알아듣기 버거운 소리를 동생인 화자 윤호가 알아듣고, 윤호는 형을 잠시라도 떠날수 없음을 운명처럼 받아들인다.
형의 사고가 동생으로 인한 것이라는 죄책감에서 하루도 자유로울 수 없는 윤호는 형의 맞선자리에서
'림해화'라는 여자를 점찍어 형의 아내로 맞이한다.
림 해 화..
조선족인 해화는 중국을 벗어나기 위해 형과의 결혼을 결심하고, 육체적인 사랑이 아닌 마음속에 있는 남자를 그리워하며, 속초를 꿈꾸며 한국으로 온다.
한국에서의 일상은 평온하기만 하다.
발목이 절단된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온갖 정성을 쏟고
남편은 해화에게서 사랑을 느끼며 꿈결같은 결혼생활을 지탱해 나간다.
그런 어느날부터 윤호의 마음속으로 해화가 들어오고
해화의 마음속에 윤호가 자리하기 시작한다.
형을 위해서, 형수를 위해서 집을 떠난 윤호는 배를 타게 된다.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애써 묶으며 동춘호에서 중국과 속초를 오가며 살아간다.
시어머니가 죽고, 시동생이 떠나자 형의 발작같은 행동이 시작된다. 포근하고 따스하던 남자가 돌변하여 해화를 가두고, 전선줄로 해화를 묶어 꼼짝도 할 수 없게 한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횟수가 잦아지고, 정도가 심해진다.
온밤내내 전선줄에 묶인 손과 발에 멍이 들고
얼굴에 퍼런 멍이 가시질 않고
핏자국이 잦아지던 어느 날 새벽,
해화는 집을 나선다.
조선족으로 외면당하는 현실과
한국사회의 이율배반적인 행동들,
찌꺼기처럼 들어앉은 남자의 분신인 아이,
조금씩 조금씩 부셔져 나오던 아기의 핏덩어리를 쏟으며
남자를 쏟아내고, 자신을 쏟아내던 해화,
일하던 여관에서 내침을 당한 해화는
조선족인 아짐에게 얹혀 살게된다.
지하도에서 약을 팔던 아짐이 경찰서로 끌려가자
해화는 그 여자의 약을 팔고, 약을 팔기보다
약을 하나씩 하나씩 먹으며 자신을 죽여간다.
꿈에 그리던 남자를 찾아 속초로 향하는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마약에 중독되어가며 폐인이 되어가는 모습이
안쓰럽고도 딱하다.
해화를 찾아나선 형은 생을 포기한듯이 홰화를 찾는다.
미친듯이 해화를 찾던 형이 훈춘에서 속초로 향하는 바다에 몸을 던지고 동생만이 집으로 돌아온다.
조선족들이 겪는 힘든 삶들이 여과없이 드러나고
결혼하지 못한 노총각들의 어수선한 모습이 감춤없이 드러난다. 애써 결혼한 여자가 자신을 떠날까봐 불안해 하는 모습과 사랑없이 살아가는 여자들의 고단함,
형의 여자를 마음에 품으며 괴로워하는 남자의 모습과
그런 남자를 향하는 애틋한 여자의 마음도 잘 그려진다.
윤호와 해화가 번갈아 독백하듯이 늘어놓은 이야기들,
충분한 공감과 이해가 됨으로 마음이 아프다.
살아가는 것,
어쩌면 이 세상에서 우린 모두 서커스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때론 위험하고 때론 남을 웃기기도 하는...
서커스가 끝나고 막이 내려진 무대의 쓸쓸함처럼
우리 인생도 행여 그렇지나 않을까?
참으로 괜찮은 책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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