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감상문

순교자 주기철 목사생애

여디디아 2016. 6. 11.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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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필  때  가버린  사람

 

순교자  주기철  목사생애

 

김충남 지음 / 은혜출판사

 

일사각오(一死覺悟)

"주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주님 최후의 피 한방울까지도 다 쏟으셨습니다.

 주님 이렇게 날 위해 죽으셨거늘

 내 어찌 죽음을 무서워하리오"

(주기철 목사의 일사각오)

 

주후 1897년 11월 5일 경남 창원군 웅천면 북부리에서 부친 주현성장로와 모친 조재선 여사 사이에 4남으로 태어난 주기철 목사어릴때의 이름은 기복이었다고 한다.

유년시절 주목사님의 집안은 유복한 편이어서 웅천개통학교라는 학교를 집안에서 세울만큼 넉넉한 편이었고

아버지 주현성 장로를 비롯한 어른들 또한 신교육에 일찍 눈을 뜸으로 유교사상이 만연한 가운데서도 기독교를 받아들여 일찍부터 신앙중심의 삶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주기철 목사님은 어릴때부터 유난히 총명하고 특히 말을 설득력 있게 함으로 삼촌들과 형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분명하게 전달하여 어려서부터 고집도 셌지만  남의 입장을 배려하기도 했다고 한다.

특별히 일찍 어머니를 여읜 형님들을 생각하며 자신만이 어머니가 살아계심을 늘 미안해하며 형님들과 함께 지내기를 즐겨했다고하니 어쩌면 목사로서의 기질은 태어나면서부터 지니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웅천면 개통학교를 졸업한 기철은 이승훈장로께서  설립한 오산학교에 입학하여 신앙교육을 받으며 이곳에서 고당 조만식선생과 남강 이승훈선생으로부터 신앙교육을 전수받으며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오산학교에서의 교육과 훈련이 결국 훌륭한 목사의 길을 걷게 한 밑거름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남강과 고당 선생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며 역시 후학을 길러내는 일이 대단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분들의 영향으로 오산학교에서의 그는 민족주의로 나라를 향한 불타는 애국심을 가지게 되고 한걸음 더 나아가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신앙이 우선시되어야 함을 깨닫게 된다.

 

오산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주기철 목사님은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지만 안질환으로 부득이 중퇴를 하게되고 이 후 고향인 웅천에 돌아와 청년운동과 교남학회를 지도하면서 후배들을 가르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  신유와 복음의 목사 김익두 목사의 권유로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목사안수를 받은 그는 부산의 초량교회에서 6년을 시무하고 마산의 문창교회(당시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다)에서 6년을 시무하고 평양의 산정현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된다.

주기철목사님이 목사로 부임할 때 부터 이미 일제강점기를 맞이하여 일본의 위세는 전세계를 향하여 하늘 높은줄 모르게 기세가 등등하고 특별히 우리를 식민지로 삼고 있을 때였으므로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있던 때이기도 했었다.

주기철 목사님은 한국교회가 신사참배에 동참하는 것에 반대입장을 분명히 함으로 한국교회를 지키는데 앞장을 섰고, 

일본경찰의 눈에는 가싯거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산정현교회에서 신사참배에 불응하며 순교자의 길을 선택한 주기철 목사와는 달리 평북노회는 신사참배에 가결함으로 한국교회는 우상에게 무릎을 꿇는 오점을 남기게 되고 많은 교회의 목사님들이 자신의 영욕앞에 하나님을 뒤로한채 신사참배에 동참을 하고 심지어 주기철목사님을 산정현교회의 목사직에서 밀어내며 사택에서 가족들을 내쫓아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주기철목사님은 옥중에서 몇번의 가석방이 이루어졌을 때 이미 자신은 일본의 옥중에서 순교할 것을 알고 계셨다.

마지막 설교는 마태복음 5장 11~12절, 로마서 8장 31~39절로 "다섯가지의 나의 기도"란 제목으로 유언같은 마지막 설교를 하셨다.

첫째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둘째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게,

셋째 노모와 처자를 부탁,

넷째 의에 살고 의에 죽도록,

다섯째 내 영혼 부탁의" 이러한 요지의 설교였다.

 

1944년 4월 21일 밤 9시 30분경 49세의 일기로 일본의 옥중에서 순교하셨다.

이후 안이숙선생의 간증에 의하면 일본인이 독극물 주사를 투여해서 타살을 했다고 한다. 

 

기독교에서는 주기철목사님의 신앙은 모두가 본받아야 할 모습이다.

자기의 목숨을 내놓으면서도 우상앞에 절하지 않는 불굴의 모습을 보며, 지금의 나라면 과연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음을 고백할 수 밖에 없다.

 

지금 주기철목사님의 묘소는 평양에 있지만 국립묘지에는 가묘가 있으며

경남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로 174에는

항일운동가 주기철 목사 기념관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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