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어시간
한 강 / 문학동네
남자와 여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실 때,
남자를 만드시고 다시 여자를 만드셨다.
이 후 남자와 여자는 세상을 다스리고 누리고 즐기고, 다시 자식을 낳아 후손을 이으며 살아가기를 반복한다.
그런고로 언제 어디서나 인간은 남자와 여자가 함께 공존을 하고, 사건의 이유에도, 사연의 이유에도 분명히 남자와 여자가 비밀처럼 들어있다.
책이나 영화나 노래나 드라마나...
눈물이나 웃음이나 뭐든지 남자와 여자가 이유라는 것이 문득 새삼스럽고 어쩌면 허전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희랍어시간이란 이 책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있다.
누구나 예외일 수 없이 사연을 가지고 살아가는 흔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 말이다.
열다섯살의 나이에 가족을 따라서 독일로 이민을 떠난 남자는 서른 일곱의 나이에 홀연히 다시 고국을 찾아온다.
가족의 반대와 배반감을 뒤로한채 다시 찾은 고국은 외톨이란 느낌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국에서의 삶이 고립된 섬처럼 외로웠던 남자는 희랍어를 배움으로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고,
자신의 마음을 잡아주었던 희랍어를 가르침으로 고국에서의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여자,
어려서부터 유난히 총명하고 영민했다는 여자,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낱말에 대한 이해력과 단어에 대한 습득이 유난했던 그녀는 열일곱의 어느 날
불현듯 말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어느 날, 불어시간에 불어를 배우며 다시 말을 찾게 되지만 결혼을 하고 이혼을 하며 다시 말을 잃어버리게 된다.
다니던 직장을 잃게 되고 함께 지내던 딸의 양육권마져 빼앗긴 여자는 희랍어를 배우게 된다.
희랍어를 가르치는 강사는 유전적인 이유로 시력이 점점 흐려지고 결국엔 시력을 잃을 것을 알고 있다.
수업시간 내내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는 여자를 보며 눈을 잃어가는 남자는 신경을 쓰게 되고,
과거의 애인을 생각하게 된다.
말을 잃어가는 여자를 보며 옛애인을 떠올리는 남자와,
그런 남자를 바라보며 겹쳐질 수 없는 시간과 기억과 추억과 안타까운 딸과의 시간을 떠올리는 여자의 되새김이
아슬아슬하게 교차한다.
살아가다 보면 때론 세상의 것을 보고 싶지 않을 때가 있고, 입에서 나오는 말을 잃어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순간이 지나면 자유롭게 볼 수 있고 말할 수 있음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깨닫게 된다.
존재하는 것들을 볼 수 없는 안타까움과, 해야할 말을 하지 못하는 슬픔을 과연 이해한다고 감히 말할 수가 있을까?
편지처럼, 독백처럼,
나직히 중얼거리는 듯한 글이다.
비가 내리는 날에 읽으면 참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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