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여자의 열매
한 강 / 창비
새해가 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나 역시 새해의 결심을 몇가지씩 정하곤 한다.
그 중 첫번째가 무조건 성경 1독이기 때문에 1분기 정도는 다른 책을 잘 읽지를 못한다.
스스로의 약속이라 지키지 않는다고 누가 책할 사람도 없고 벌금을 낼 일도 없지만, 보이지 않는 나 스스로의 결심을 지켜내는 것 또한 나의 몫임을 알기에 가능하면 지키려고 노력을 하고, 누구나 쉽게 도전할 수 없는 좋은 습관이기에 오래도록 실천하고픈 욕심이기도 하다.
올해는 성경읽기를 예상보다 빠르게 끝을 내었는데, 그러고보니 지난해 교보문고 이벤트에서 당첨된 책 꾸러미가 가득하다.
두란노에서 온 책이기 때문에 신앙서적이라는 게..... 부담이다.
신앙서적과 며칠전에 읽은 '운명은 없다' 같은 책을 읽으면 사실 많이 부담스럽다.
나의 신앙을 돌아보게 되고 하나님앞에서 나의 신발끈을 다시금 졸라매어야 하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운명은 없다'처럼 인생의 성공자가 쓴 책들은 배워야 할 내용들이 대부분이라 또한 부담스럽다.
내용 한줄한줄이 모두가 소중한 내용인지라 머리속에 쏙쏙 심어야 하는데 어쩌자고 다음 장이 되기도전에 가물거릴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 책을 읽을때는 바짝 긴장을 해야하고 한 마디라도 내 것으로 만들어야겠다는 가당찮은 욕심이 나를 긴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오랫만에 좀 편하고 재밌고 늘어진 자세로 읽어도 괜찮은 책을 읽고 싶었다.
달달한 연애사도 좋고, 가슴시린 이별도 좋고, 눈물을 질질 짜대는 삼류소설이라도 괜찮을 것 같다.
쌓여진 책 중에서 한 강의 '내 여자의 열매'를 들었다.
어느 날 그는
아기 부처
해질녘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
붉은 꽃 속에서
내 여자의 열매
아홉 개의 이야기
흰 꽃
철길을 흐르는 강
해설-황도경
중단편으로 이루어진 한 강의 두 번째 소설집이다.
책은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 속의 이야기들이라고 하면 되겠다.
8편의 소설 중 기이하게도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은 책의 제목으로 쓰인 '내 여자의 열매'이다.
한계가 분명한 나의 독서력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며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소설가로서는 수준높은 글이기 때문에 제목으로 채택하였을지 모르지만 읽는 독자는 애매하기만 하다.
내가 가장 재미있게 읽은 글은 '아기 부처'이다.
아기 부처...에서는 뉴스 앵커의 일상이 그려진다.
텔레비젼에서 보이는 그는 깔끔하고 이지적이고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완벽한 아나운서이지만, 그의 몸은 중학생때 입은 화상으로 목에서부터 사타구니에 이르기까지 흉물스럽도록 화상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 어쩐지 편안할 것 같다고 생각한 여자와 결혼
한 남자는 아내의 움추림으로 인해 외로워하고, 아내는 결국 사랑하지 않은 남자와의 결혼을 후회하며 끝을 보고싶다는 염원으로 살아간다.
방송국 악단의 바이올리스트가 남자를 사랑하게 되고 이혼도 하기전에 그들은 사랑을 과시하지만 그의 몸을 알게 된 순간 젊은 여자는 그를 떠나게 된다는 내용이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생활은 얼마나 숨이 막히며 피가 마르는 삶일까.
특히 육체의 부딪침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며 괴로움이고, 그런것을 알면서도 자신을 맡겨야 하는 이에게는 견딜 수 없는 자존감의 상실이 아니겠는가.
온몸에 화상의 상처가 휘감고 있는 남자의 외로움도 이해가 가고, 그런 남자를 선뜻 품을 수 없어서 늘 끝을 바라보며 자유를 갈구하는 여자의 마음도 어쩐지 이해가 된다.
'어느 날 그는'과 '해질녘...'과 '붉은 꽃 속에서'는 비슷한 아픔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왜 우리는 사랑 때문에 힘들어하고 사랑 때문에 죽이고 사랑 때문에 도망을 해야 할까?
사랑이란 이름으로 함께 살아가면서 같은 이불을 덮고 ,같은 시간에 같은 반찬으로 같은 밥을 먹다가도 어느 날 모든 것이 깨어진 유리조각처럼 박살이 나 버리는 것이 사랑놀음일까?
그로 인해서 누군가는 상처를 받고 누군가는 숨어야 하고, 무엇보다 부모들의 깨어진 사랑 때문에 가장 큰 피해자는 어린자녀들이다. 사랑의 깨어짐의 징조는 말다툼에서 시작하고 침묵으로 이어지고 급기야 폭력으로 이어지고 가출이나 죽음으로 이어진다.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자라는 아이들의 인격은 허전하기만 하고 외롭고 슬프고 불신만 쌓이게 되는 것임을 어른들은 알지 못한다. 물론 전부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여자 작가이기에 표현할 수 있는 여자들의 미세한 떨림이나 섬세한 마음까지도 정확하게 표현함으로 읽는 이로 하여금 공감을 느끼게 하며 충분한 이해를 할 수 있도록 한다.
특별히 마음에 기억하지 않아도 좋고 읽던 책을 뒤집어 놓았다가 다시 펼쳐도 앞페이지를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책,
물론 그렇다고해서 소설의 내용들이 가볍거나 속이 헛헛한 것은 결코 아니다.
생각하지 않고 거침없이 살아가는 우리의 내밀한 성정과 내밀한 곳들을 들여다보게 함으로 지금 나의 마음은 어떠한 것인지,
나의 사랑은 또한 얼마나 빛이 바래었는지,
그러므로해서 나는 인생의 어느 자락에서 휘청거리고 있는지,
내용없이 소비되어지는 것들과 추락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하고 다시 다잡아야 하는 삶에의 희망과 사람과 사람간의
끈은 어느 정도의 굵기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한강의 다음 책을 기대하며
메르스로 인해서 우울한 유월의 주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