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한 강 / 창 비
1980년 5월
그때 광주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삼청동이 직장이었던 나는 아침마다 한국은행에서 금융연수원으로 가던 셔틀버스가 스톱하고,
한국은행 동서남북의 문에서는 탱크와 군인들이 무장한채 버티고 서 있었고
안국동 로타리에서부터 삼청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차량이 금지되고 있었던 그때,
퇴근 후 광화문에서 37번이나 38번을 기다리던 나에게 직장상사는 추근거렸던 추잡한 기억이 있다.
아무리 나이가 어리고 순진하다고는 해도 불순한 의도의 친절은 낌새를 알아차리고 당당하게 거절하던 때,
지금 생각해도 무서운 상황, 곧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상황에서도 참 당돌한 반응이었고 똑똑한 처사였음이...
오월,
육군수도병원 울타리의 장미가 날마다 아름답게 피어오리던 그때, 안국동에서부터 삼청동에 이르기까지,
경복궁과 청와대로 향하는 길목, 금융연수원 정문앞에는 총을 든 군인들이 탱크를 둘러싸기도 하고 곳곳에 삼엄한 모습으로 버티고 있었을 때, 계엄이 선포되어지던 그때까지도 난 사태의 심각성을 몰랐던 것 같다.
훗날, 모든 일이 잠잠해진 다음에야 그때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지를 제대로 알게 되었다.
소년이 온다.
작가 한 강은 한승원 선생님의 딸이다.
혈통을 이어받아 좋은 작품활동을 하는 그녀를 보면 어딘지 든든하다.
책을 읽는동안 여기저기 등장하는 인물이 어수선해서 누가 주인공인지,
책이 나타내고자 하는 정확한 의도가 무엇인지,
등장인물의 구도는 또 어떤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나의 열등감이 잦은 짜증까지 유발할 지경이었음을 고백한다.
글을 다 읽고난 후에야 분명하게 나타나는 줄거리와 상황들,
작가가 지어낸 추상적인 글이 아니고 사실을 들추어낸, 많은 자료들을 검토하고 살아있는 사람들의 증언을 중심으로 엮어진 글이다.
한승원 선생님이 살았던 광주의 옛집이 글의 중심지이다.
한승원 선생님이 서울로 이사를 한 후, 그 집에 들어와 살았던 단란한 가정의 모습,
아버지와 아들 셋, 그리고 대문간에 방 하나를 세를 놓았고 막내아들 동호와 같은 학교의 친구인 정대가 누나와 함께 가난한 자취생활을 하는 실제의 집이다.
1980년 5월 어느 날,
문간방에 자취하는 친구 정대와 동호는 누나를 찾기 위해 집을 나서고, 집을 나서는 순간 짐작조차 싫은 데모행렬과 군인들의 마구잡이의 총질과 폭력앞에 마주한다.
어느순간 정대가 군인들이 쏜 총에 맞아 쓰러지고 이후 동호는 정대의 시체를 찾기 위해서 시체를 모아둔 곳을 찾아 다니게 된다. 정대와 정대누나의 시체를 찾아다니던 동호는 대학생들이 봉사하는 곳에서 시체에 이름과 누군가를 구별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시체를 돌보는 일을 하게된다.
대학생들의 반대에도 끝까지 남아 그들을 지키던 동호마져 군인들에게 목숨을 잃게 되고 그로 인해 남은 가족들의 고통을 이야기한다.
광주사태에서 죽은 이들의 독백과 몸서리쳐지는 고문을 당한 여자들,
그로 인해서 평생을 좌절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자살하는 사람, 죽어가는 동료를 바라보며 살아있으나 죽은 것과 같이 살아가는 사람,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을 이용하는 사람,
같은 상처를 가지고 서로를 보듬고 기대며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이야기.
전쟁속에서 살아 남은 자와 죽은 자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에필로그를 읽으며 구체적인 사실과 현실의 생생함이 기어히 눈물짓게 만든다.
동호의 큰 형이 들려주는 어렵고 참담한 이야기들,
작가가 소설로 써도 좋으냐고 물었을 때 형이 말했다고 한다.
"허락이요? 물론 허락합니다. 대신 잘 써주셔야 합니다.
제대로 써야 합니다. 아무도 내 동생을 더이상 모독할 수 없도록 써주세요"
잊혀진 줄 알았던 광주 5.18
여전히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이고 상처일 뿐인 것이 마음아프다.
이 순간에도 고통속에서 허덕이는 이들을 우리가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세상밖으로 나오지 못한채 안으로 안으로만 기어드는 그들의 영혼과 육신의 상처는 과연 누가 치료해 줄 수 있을까.
바라건대 치유함을 받을 수 있기를, 세상밖으로 나올 수 있는 용기를 얻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