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말아요, 기타
김 형 경 / 사람풍경
그 시절에는 빛과 그림자를 뒤섞고 추억과 욕망을 반죽하고
사물과 열정을 뒤적거려 무엇인가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노래나 사랑이나 아름다움 같은 것들. 돌이켜보면
그 시절 모무함, 어리석음이 그립다.
사물과 열망들이 저만치 시간 속에 떠서 흘러가고 있다.
책이 들어가는 입구 문에 쓰인 글이다.
그 시절, 영숙과 혁진, 상기와 지운과 명헌이 '솔개바람'이라는 그룹으로 밤 업소를 전전하며 노래를 하고
가슴이 에이는 사랑의 불꽃을 가슴에 품고, 노래를 하는 목적이 오롯이 음악에 대한 경건함이고 대중을 바라보기 보다는 음악 자체를 인정하고 노래 하나로 위로를 받으며 희망을 품으며 청춘을 불사르던 그때이다.
흔한 유행가라고 할지언정 그들에게 음악은 삶이었고 희망이었고 미래였음으로.
그러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밥을 먹어야하고 옷을 입어야 하고, 따라서 인기를 등에 업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가는 그때, 가난한 솔개바람의 이름으로는 스타의 대열에 끼어들 수 없음으로 무참하고, 업소의 형편이 좋지않다는 이유로 일순위로 자리를 짤려나갈 그때, 라면만 먹으며 한 삼년을 버틴다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허영인지를, 실현할 수 없는 사치인지를 앎으로 그들 가난하고 이름없는 가수들은 곤핍하고 고단기만 했다.
영숙이 혁진을 그윽한고 은밀한 마음으로 사랑을 하고, 이를 알면서도 무심한척 하는 혁진과 그들을 지켜보는 지운의 또하나의 사랑,
영숙이 이건기획에 들어가 스타가 되기까지 이건호의 사람만들기에 따른 모든 프르그램들,
한 명의 스타를 만들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하고,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삶을 송두리째 짓밟아야 하는지를 눈을 뜨고 바라보아야 하는 막막한 현실들, 그또한 얼마후 자신에게 돌아올 몫임을 아는 사람의 허전하고 쓸쓸한 고독함..
한 명의 스타가 되기 위해선 나를 버리고 또다른 내가 만들어져 가는 기이한 현실앞에서 마음에 산을 품은 후에야 받아들여지는 이름없는 여가수의 슬픈자화상,
화려한 여가수들의 이면을 낱낱히 파헤치는 현실의 단면이기도 하다.
그런 뻔한 스토리이지만 책을 놓을 수 없는건 김형경이라는 작가의 고래힘줄같은 힘이다.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손에서 놓으면 다음에 이어지는 마음줄이 궁금해서 다시 펴게 되는...
568쪽이라는 긴 소설의 내용은 육신의 움직임보다, 하루 24시간을, 10년이라는 시간을 살아내는 일상의 생활보다,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고 친구를 만나고 일을 하고 잠을 자는 것, 몸이 움직이는 동선보다는 단 한 순간의 마음의 움직임,
마음의 동선이 너무나 세밀하게 그려져 있어서 책을 놓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영숙이의 마음과 영혼까지를 냉철하게 파헤치는 심리전,
이십대의 여자의 생각치고는 너무나 성숙하고 완연한 마음의 표현들과 성숙한 모습들은 영숙이의 모습보다는 훨씬 어른스럽다.
젊은 날 미군부대에서 색소폰을 불던 영숙 아버지의 마음또한 보통의 사람들이 가지는 마음보다는 훨씬 크다는 것을 글을 읽는 사람이면 누구나 느낄 것이다.
아무래도 작가의 마음이며 작가의 생각이겠지.
심리학을 공부하고 정신분석학을 다늦은 나이에 열심히 공부하던 작가가 사람의 겉 모습보다는 보이지 않는 내밀한 곳,
마음밭을 속속들이 그려놓은 것이다.
'천개의 공감'이나 '만 가지 행동' 처럼 심리를 분석하고 철학으로 치닫는 글은 읽기에 재미보다는 수업에 동참하는 형식이라면
'울지말아요'는 소설속 주인공들의 심리를 어렵지 않게, 스스로 심리전이라고 느낄 수도 없도록 써내려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심리학을 공부하는 덤을 얻기도 한다.
소설의 내용도 좋지만 각 인물들이 가진 마음의 크기와 마음이 다름이 즐겁다.
긴긴 글을 읽고난 후, 어쩌면 스스로 한뼘쯤 성숙해 있음을 느끼게 되는 책이기도 하다.
입추,
뜨거운 햇살속에 유영하는 바람속에, 가을이 한줌 살짝 얹힌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