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경 리 지음 / 현대문학
젊은 박경리를 만나다!
47년만에 깨어난 故 박경리의 미출간작
교보문고에서 '박경리의 신작'이란 글을 대할 때, 뭔가가 잘못 되었나 싶었다.
이미 모든걸 내려놓고 편안히 갈 수 있어서 기쁘다고 하신 박경리선생님이 우리곁을 홀연히 떠나신지 3년이 지났는데 신작이라니... 돌아가신 분이 다시 환생했을리도 없고, 지난 글들을 다시 묶어서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게 상술적으로 다가드는가... 싶기도 했다.
그러나 '파시'와 함께 '부산일보'에 연재된 소설이라는 것, 박경리선생님을 주제로 박사논문을 쓰던 분에 의하여 세상으로 나오게 되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녹지대,
적당한 습기와 알맞은 온도, 그리고 맞춤하게 내리쬐는 햇빛과 더함도 덜함도 아닌 바람이 지나는 자리에 녹색의 풀들이 기웃거리고, 하늘을 향한 나뭇가지들이 휘청거리며 이파리를 쏟아내고, 흔하디 흔한 들풀과 잔풀들이 우후죽순으로 자라는 곳,
도시의 이미지는 얼씬거리지 못한채 가득한 평화가 남실거리는 듯한 곳,
훗날 고된 젊음을 마치고 평안한 노후를 위하여 남쪽 대문을 만들고, 황톳길을 걸으며 해바라기를 할 수 있음으로 남은 생을 정리하며 갈무리하기에 딱 좋은 그런 곳인줄 알았다.
책을 펼치자마자 녹지대가 서울 한복판의 다방이름이며, 예술을 즐기는 문학도들이 약속도 없이 드나들며 함께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우정을 쌓아가는 흔하디 흔한 찻집이란걸 알고는 조금 놀랐다.
소설의 무대는 서울의 가장 중심이 되는 명동,
청춘을 앓고 있는 사람들과 생을 살아내는 사람들, 외롭고 가난한 젊은이들이 역시 고단한 삶을 찬미하고 세상의 권력과 물질을 외면한채, 문학에 미쳐가는 모습들을 마치 지금의 모습인양 그려간다.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한꺼번에 잃은 하인애는 큰집에서 더부살이 인생인듯이 힘들게 살아가지만
시를 씀으로 위로받고, 시를 나누는 친구들의 형편을 살피며 문학의 세계를 넓히며 살아간다.
하인애가 사랑하는 김정현은 친구와의 다툼으로 뜻하지 않게 살인을 저지른다.
아무도 보지 못한줄 알았는데 뜻밖에 육촌누나가 살인을 저지른 김정현을 발견하고 이후 김정현을 옭조이며 인애의 사랑에 비극을 데리고 온다.
사람들은 왜 이다지도 외로운 존재일까.
가정을 이루고 살면서도 외로운 하흥수와 최경순여사,
그런 최경순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사랑에 아파하는 한박사,
김정현을 사랑하는 하인애를 바라보는 정인호의 고달프고 서러운 사랑,
박광수를 사랑하지만 환경의 벽을 느낀 은자의 선택과 그런 은자를 향한 은밀한 사랑을 키워가는 한철의 사랑은 또다른 이름일까.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가 다른 사랑을 바라보는 것인지 모르겠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바라보지 않음으로 아파해야 하는 몹쓸 이름의 사랑이.
약속이나 한듯이 서로의 사랑이 다른 사람을 향하고 있는건 소설이기 때문일지라도 좀 잔인하다.
사랑을 잃지 않고 쟁취하려는 마음과, 외면하는 마음,
목숨을 내어 놓고라도 사랑을 지키려는 의지는 또 어떤 사랑일까.
'아프면 아플수록 그것에서 피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더 접근해 가는 인애다.
눈물이 흐르면 고개를 숙여 그것을 감추느니보다 얼굴을 쳐들어 웃어야 하고,
무서운 일이 있으면 도망치기보다 뒤돌아서서 가슴으로 바로 받아야 하는 인애,
누가 베풀어주면 겸손하게 감사를 올리기보다 더욱 더 크게 요구하는,
가령 십만 환짜리 코트를 기어히 맞추고 마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야 했던 우리들의 청춘이 아니었을까.
책을 읽으며 이미 오래전의 내 모습을 추억해 본다.
스무살의 내 사랑도 가끔 아팠고 가끔 소금물에 배춧잎이 절여지듯이 가슴이 저리기도 했었다.
내가 의식하지 못함에도 발길이 이미 그쪽으로 향했던 푸르던 사랑또한 경험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우리는 모두가 사랑으린 이름으로 외롭고, 사랑이란 이름으로 아픈건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으며 청춘이란것이 아프지 않을리 없고, 삶이란 것이 고되지 않은 것이 없음을 확인했다.
봄이...
그리운 봄이,
녹지대를 만들기 위하여 시나브로 다가와 선생님의 무덤위에 한줌 햇살로 머무르리라.
통영의 어느 산에서 고른 잠을 주무실 박경리선생님이 그리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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