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완 서 / 문학동네
사진속 박완서 선생님은 여전히 촌에서 갓 상경한 시골처녀 같은 모습이시다.
수줍은 미소, 낯가림이 심하여 누구와도 선뜻 말을 나누지 못할 것 같은 모습,
생전 누구에게도 싫은 소리를 못하셨을 것 같은 분,
단 한번도 잘난체 하지 않으셨을 듯한 분..
그러면서도 어딘가에 그렇듯 신랄한 표현이, 한치의 예외도 어긋남도 없는 말들을 정확하게 풀어놓으셨는지.
다시금 가만히 사진을 들여다 본다.
여전히 시골에서 막 도착한 수줍은 처녀이다.
'2012. 2. 9
사랑합니다.
오늘은 즐겁게 내일은 더 행복하게~~'.
라는 나란한 글씨속에 가득한 마음을 담은 남필희 집사가 건네준 생일선물이다.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받았는데, 이미 읽은 책이라 바꾸어 달라고 당당히 요청했다. ㅋㅋ
박완서 선생님 책은 출간되는데로 읽은터라 '기나긴 하루'의 출간소식은 여전히 나를 의아하기 했다.
더러 고인이 남긴 발표하지 못한 유작들이 있던터라 반가운 마음으로 받았는데
이 책은 선생님을 추억하며 선후배 문인들이 추천하며 선생님을 그리워하며 묶어놓은 글들이다.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
여섯권의 단편중에 읽어보지 못한 작품은 이것 뿐이다.
'석양에...'는 읽어보진 않았지만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들이다.
박완서 선생의 자서전이라고 해도 다름이 없는 글이다.
어릴적 할아버지 사랑을 받으며 일찌기 글자를 깨우치고 개성에서 도시를 막연히 목말라 하던 시절,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하여 엄마가 오빠를 데리고 서울로 가서 오빠를 키우다가 선생을 데리러 왔던 일,
매동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주소를 옮기고, 옮긴 주소와 살고있는 집의 주소를 외는 일로 스트레스를 받았던 어린 시절,
선생님이 가정방문을 오셨을 때, 엄마는 매동의 친척집에서 여봐란듯이 주인행세를 하며 어린 소녀에게 힘을 실어준 이야기 들,
유년의 시절을 지나고 전쟁을 맞이할 때까지의 고단하고 아득했던 시간들,
오빠의 죽음과 남겨진 조카들과 엄마를 위한 생활을 책임져야 했던 때, 그리고 결혼생활과 남편과 아들을 잃은 아픔과 남겨진 자의 외로움과 무망함과 참담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어야 했던 순간들을 낱낱히 적어놓은 글들이다.
선생님의 일생을 요약한 글이라고 보면 맞을 수 있을 것 같다.
빨갱이 바이러스
강원도 강릉, 유난히 비가 많이 쏟아진 여름날이다.
친정동네에 부모님이 살고 계시던 집은, 부모님이 아들을 따라 이민을 가시며 딸인 '나'에게 집을 남겨주셨다,
평소에 그 집을 좋아하던 남편과 '나'는 별장으로 이용하기도 하는데, 마침 친구엄마가 비로 인하여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별장으로 찾아든다.
비가 많이 내려 곳곳의 길이 소실되고 그에따라 버스가 다니지 못하는데 소식을 모르는 사람들이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 나는 차를 돌려 그들을 별장으로 데리고 와서 하룻밤을 묵게 한다.
전혀 남남인 세 여자들이 하룻밤을 묵으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과정을 이야기하는 모습들을 보노라면 이것이 소설인지,
실제 친구들의 이야기인지 정말 분간이 되질 않는다.
남편의 의처증에 질식할 것 같았던 여자는 강도가 집에 들자 베란다에서 뛰어내림으로 남편으로 부터 진정 자유함을 얻고 그로부터 정말 마음껏 외간남자와 바람을 피우며 죄 의식도 갖지 않은채로 살아간다는 소아마비 아줌마의 고백,
뇌성마비 아들을 고아원앞에 갖다 버리고 다시 아들과 딸을 낳고 살아가다 어느날 그 아이가 불쌍하여 고아원에서 봉사를 하는 뜸 아줌마, 담뱃불로 여자를 지지는 남편의 상처는 몸 안에 있지만 자신의 상처는 몸 밖에 있다며, 똥오줌도 못가리는 아이는 천사의 대접을 받고 있다고 고백하는 여자의 이야기,
아들과 손자들이 외국으로 이민을 가고 유독 할머니를 좋아핟던 큰손자는 외국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여 다시 할머니 품으로 돌아오고, 손자를 위하여 과외선생을 들이고 과외선생을 통해 남자를 느끼고, 잊고 있었던 욕망이 부르르 튀어나와 양양으로 시장을 갔다오는 사이에 손자가 강물에 휩쓸려 죽고, 그 죽음에서도 느끼지 못하던 젊은 남자의 욕심은 돈을 요구함으로 땅에 설 수 있었다는 여자의 고백을 들으면서도
'나'는 어린시절 삼촌이 월북을 하고, 삼촌으로 인하여 할아버지와 부모가 노심초사한 일과 어느날 삼촌이 아버지와 말싸움을 하던 모습을 발견하고, 아버지가 삼촌을 죽이는 모습을 본 일을 발설하지 못한채 혼자서 삭히는 '나' 끝내 입을 열지 않음으로 빨갱이 바이러스를 스스로 인정하고 만다.
'갱년기의 기나긴 하루'
지금의 내 모습이 아닐까 싶을만치 공감이 가고 어쩌면 나만이 앓고 있음이 아니라는 사실에 위로가 되기도 한다.
돈 많은 시어머니의 당당함, 자신도 모르게 굴복되어지는 모습들,
어느 하나 내것이라고 내세울 수 없는 가난하고 지리한 생활들,
이혼한 시누이의 자유가 어쩌면 부럽기도 하여 이혼을 생각해 보는 마음을 누가 욕할 수가 있을까.
'카메라와 워커'
일찍 부모를 잃은 조카를 키우며 젖을 물리고 싶었고, 내 아이보다 더 살뜰하게 보살피던 조카의 앞날에 간섭하며
오직 잘되기만을, 잘 먹고 잘 살기만을 위하여 빌었던 할머니와 고모의 마음은 기어히 조카를 아프게 하고 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하고 만다.
일요일이면 카메라를 메고 아이들을 앞세우고 도시락을 준비하며 단란하게 살아가길 바래는 할머니와고모앞에 현장에서 먼지 자욱한 워커에서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체념한듯 살아가는 조카에게서 미안함과 안타까움을 느끼는 고모의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글이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몇번을 읽어도 마음아픈 글이다.
의대생인 아들을 잃은 선생의 참담한 슬픔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무망함과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내 아들'에 대한 사무친 마음들이 읽는 이들의 마음을 눈물로 사로잡게 만든다.
동서와의 전화통화를 이야기로 이끌어가며 내 자식을 잃었을 때의 슬픔과, 남들앞에서 씩씩하게 보이려던 엄마의 간절한 발버둥침이 결국은 자신을 속이는 일이었음을 고백하는 내용이다.
아들을 잃은 엄마의 슬픔이 살아있는 딸들에게 '살아있음'을 미안하게 만드는 것이 본인이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함께 잇는 사람들은 그런 마음을 가질 수 밖에 없는것이 자식을 잃은 자의 슬픔이 아닐까.
박완서 선생님의 작품중 가장 슬프고 마음이 아픈 글이라고 생각한다.
신경숙의 추천글이며 박완서 선생께 보내는 글을 보니 역시 신경숙다운 작품을 골랐다는 생각이다.
'닮은 방'
같은 집, 같은 구조, 같은 음식과 같은 생각을 하는 아파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한창 유행하던 집에 대한 구조와 물건들,
너나 할 것 없이 이웃에게 질세라 다투어 들여놓던 가구들..
결국 헛헛한 마음엔 쌍둥이 까지 헛헛해 보이게 만드는 사람들의 놀음같은 것..
후딱 읽어버리면 아쉬울 것 같아 야금야금 읽어갔지만 역시 끝은 있다.
더 이상 박완서 선생님의 새로운 글을 대할 수 없으리란 생각이 마지막 페이지를 대하기 싫게 만들었고
새로운 봄속에서 남은 책을 읽고프다는 간절한 그리움에 더듬기도 했다.
박완서선생만이 쓸 수 있던 우리 살아가는 모습들,
더함도 덜함도 없는 표현은 잊고사는 시간들과 마음을들 기억나게 하고, 버려야 할 것과 가져야 할 것이 무언지를 가르쳐준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끝까지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행복이 무엇인지조차도 가르쳐 준다.
책을 읽는동안 아프기도 하고, 그래서 눈물도 흘렸지만 행복한 시간이었음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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