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을 여 자
오정희 지음/ 랜덤하우스 출판
1947년 서울에서 출생한 오정희 작가.
내가 알기엔 여느 작가들처럼 그렇게 많은 책을 내놓은건 아닌것 같다.
가끔이지만 진심이 잔뜩 담긴, 살아가는 날동안 거짓말을 하지 않은 사람처럼, 만나는 사람들과 나누는 이야기속에도 자신의 이야기를 부풀리지 않고 아무리 잘난 아들과 딸이 있어도 드러내놓고 자랑하지 않을 것만 같은 분,
통장에 잔고가 많아도 부자인 체 하지 않으며 학식이 높고 속에 든 것이 많아도 교만하지 않으며 진솔한 사람의 향기를 그대로 품은채로, 어쩌면 평범한 아낙네보다 더욱 겸손한 모습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그런 분인것 같은 느낌이 드는건 내가 작가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탓인지도 모르겠다.
마흔을 넘어서고 아니 쉰을 넘어서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좀 더 여유로워지면 글을 쓰는데도 좀 더 자유로운 것일까.
박완서선생이나 오정희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 흔히 요즘 뜨는 작가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젊은 작가들의 글은 문체가 아름답기도 하고 세련되기도 하지만 소설이 주는 허구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이들의 글을 읽으면 삶의 모습들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다가들고 그러므로 인하여 더욱 친숙하고 공감을 느끼게도 하는 것이다.
가을 여자..
가을이 짙어갈 무렵에 도착한 책은 겨울이 푹 깊어, 지난가을에 처음으로 담은 김치가 이제서야 제 맛을 내는 것처럼, 겨울의 맛이 제대로 우러나는, 날마다 추위의 끝을 보고말겠다는 맹추위속에서 겨울여자가 된채로 읽었다.
여자, 가을...그리고 저물어가는 젊음과 인정하기 싫은 늙음이 섞인 때..
바등대던 삶에의 치열한 경쟁에서 한발 물러나 자신을 돌아보며, 성장한 자녀들은 이미 부모의 곁을 떠날 준비를 하고, 머리가 희끗해진 남편은 직장을 잃음으로 더욱 지치고 외로워지는 그런 날들..그런 모습..
욕심도 없이 자신을 바라보며 지나간 세월을 그리워 하며 잃어버린 화사한 젊음의 날을 추억하며 주위를 바라보는 시선은 거짓이 얹힐리 없고 포장된 낱말이나 덧붙이는 부요가 필요치 않다.
글을 쓴 작가는 어쩌면 나의 일상을 CCTV를 통하여 보고있는 듯도 하고, 내 속에 들어와 내 마음속을 샅샅히 훑어봄으로 내 속에 든 오장육부의 상태까지도 정확히 알고 있는 것만 같다.
간결한 단편이지만 그 속에 담긴 충분한 뜻과 무릎을 치며 '맞아 맞아'라고 외칠수 밖에 없는 글들을 읽으며 서서히 멀어져가는 내 젊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음을..
1. 철 늦은 사랑노래..에서는 결혼을 하고 자녀를 키우면서도 이성에 대한 강한 호기심과 강렬한 끌림이 아직도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음을 끄집어 낸다.
'이미 아님..'을 알면서도 '어쩌면.. 혹시나..'하는 기대는 멀어져간 사랑에 대한 그리움일지도 모르고 다시 시작하고픈 달콤한 유혹에 이끌리고 싶은 어쩔수 없는 인간의 내면의 일부일지도 모르겠다.
2. 시든 꽃의 고백...에서는 자녀를 키우는 부모의 모습과 자신을 위하여 무언가를 하려는 모습, 그리고 세월따라 변하는 생각과 마음과 기억력으로 인한 건망증에 대한 조급함을 나타내고 있다.
놀이공원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엄마가 자신의 아이를 찾는 방송을 하면서도 그것이 내 자식이란 사실도 모르는 기막힌 이야기들..
천만원을 모으느라 몇년간 노력한 가상한 노력과 그것을 지키려는 의지와 결국 비밀번호를 잊어버리는 현실의 자신의 모습...을 통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누구나 같다는 사실을 인식시킨다.
3. 가을이 깊어갈 무렵, 마흔... 마흔이란 지나간 날을 되돌아보기엔 아직 젊고, 새롭게 시작하기엔 이미 늦은 그런 나이를 살아가는 날들을 그린 글이다. 마음은 아직 푸르기만한 20대의 청춘인데 몸은 이미 그것을 거부하는 때임을 깨닫게 한다.
특히 시어머니를 모시는 며느리의 삶이 어쩌면 그렇게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는지..
월요일에 있는 집안친척의 결혼식을 위해 붐비는 주말을 피하여 금요일 오후에 시골로 내려가시라고 떠미는 며느리의 자유를 향한 갈망을 누가 나무랄 수가 있을까.
오랫만에 만나는 친척들앞에서 좀 더 근사하고 멋지게 보이고 싶어서 시장어귀에 있는 양품점에서 빨간코트를 주문한 시어머니의 마음은 며느리의 간절한 바램을 단번에 걷어차냄으로 고부간의 갈등이 깊은 골을 만들고 있는 이유를 나타내기도 한다.
4. 꽃비, 떨어져 내리고... 이른아침, 등교하는 아이들과 출근하는 남편을 위하여 새벽밥을 짓기 위하여 일어나 밖을 본 순간, 겨우내 빈 가지였던 나무에서 목련꽃이 피어나는 모습을 보며 삶에 대한 새로운 환희를 보는 주부의 마음을 그려내며 '꽃이 피어나는 그 운명적인 시간이 내 존재의 한순간과 만나 섬광처럼 부딪치고 사라졌다. 인생에의 꿈이나 그리움이라는 것도 그러한 것인가.'로 이 책은 마무리 되어진다.
특히 여기서는 아버지들의 삶의 애환이 눈물겹게 묻어난다.
피곤한 하루를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와 휴식하고픈 마음임을 몰라주고 떠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기쁠때나 슬플때나 힘들고 고된 삶에 한개피의 담배로 피로를 풀어내는 남자들에게 건강을 해친다는 이유로 여기저기에서 가시돋친 시선을 보내는 현실을 바라보며 서글픔과 외로움으로 소외감을 느끼는 아버지..
단편이라 책을 읽기도 수월하고 내용도 일상의 이야기들이라 재미가 넘친다.
삶에의 연륜을 놓치지 않고 소소한 재미로 풀어내려간 글을 읽으며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도 이처럼 재미난 순간들이 쌓여가는건 아닌가 싶어진다.
때로 짜증스럽고 때로 고달프지만 지나고나면 모든 것이 감사로 남을 것이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
그렇다.
그건 하나님의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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