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 렁 크
김 언 희(1953~ )
이 가죽 트렁크
이렇게 질겨빠진, 이렇게 팅팅 불은,
이렇게 무거운
지퍼를 열면
몸뚱어리 전체가 아가리가 되어 벌어지는
수취거부로
반송되어 온
토막난 추억이 비닐에 싸인 채 쑤셔박혀 있는, 이렇게
코를 찌르는, 이렇게
엽기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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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퍼를 열면 작은 세계가 오두마니
아가리를 벌려 무언가를 끝없이 기다리는,
끝없이 들어찰 바지며 티셔츠며
팬티며 양말이며...를 집어넣은채
작은 손지갑 하나 달랑 들고서
봄날을 달려 당신에게로 가고픈 날들,
달려가는 나를 붙잡는건 뜨락에 핀 목련,
목련위로 불어가는 봄바람의 유영,
뒷산에 곱게 핀 분홍의 진달래,
진달래를 내다보는 창가의 끈질김,
문을 여닫는 마음에 박힌 두가지의 마음,
뛰어가리라, 머물러야 하리라..
어느 하나도 선택하지 못한채
봄이라는 시간에 매인 얽매임의 자유를
즐겨야하리라.
은빛나는 트렁크 손잡이를 잡아끈채
봄을 가르며 여름이 오는 틈으로
당신을 찾아가고픈 나는
봄속으로 작아지는 꿈틀대는 벌레인가요?
(진옥이의 한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