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밤
최은영 / 문학동네
백 년의 시간을 감싸 안으며 이어지는 사랑과 숨의 기록
'증조할머니, 할머니, 그리고 엄마를 거쳐 내게 도착한 이야기
그렇게 나에게로 삶이 전해지듯 지금의 나도 그들에게 닿을 수 있을까
과거의 무수한 내가 모여 지금의 내가 만들어졌듯
지금의 나 또한 과거의 수많은 나를 만나러 갈 수 있을까
희령천문대 연구원으로 취업이 되어 희령으로 내려가는 지연으로부터 소설은 시작된다.
사람은 누구나 상처가 있고 아픔을 가지고 살아간다.
상처나 아픔없이 온전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그렇다면 그들의 삶은 아름답고 눈부시기만 할까.
문득 궁금해진다.
나와 엄마, 엄마의 엄마, 그 엄마의 엄마.
여자들의 이야기라고 해도 되겠다.
이혼의 상처와 아픔은 결국 지연을 정신병원의 약을 먹게 하지만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남자는 여자 때리지 않고 도박 안 하고 바람만 안 피워도 상급에 든다고, 그 이상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p.17)
엄마가 원하는 남성상일까,
외도로 인해 이혼을 한 딸 보다 사위의 입장을 걱정하는 엄마를 바라보는 딸의 마음은 어떨까.
딸의 아픔 보다는 자신들의 체면이 더 중요한 부모님에게서 벗어나는 것이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이라 여긴 지연이 희령에 도착하여 직장에 적응하고 있던 어느 날, 지연을 알아본 할머니가 지연에게 사과 한 알을 쥐어 주면서 접근하다.
할머니와의 거리가 좁아지고 할머니로부터 증조할머니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지연은 증조할머니와 할머니와 할아버지, 엄마와 언니 정연과 나에게로 이어지는 삶의 숨결을 본다.
증조할머니 삼천은 백정의 딸로서 개성역 앞에서 고구마를 팔고 있고, 어느날 일본군이 처녀들을 잡아가는 사실을 알게 된 증조부가 할머니를 데리고 희령으로 오게 된다.
양반이었던 증조부는 백정의 딸 삼천이이게 느끼는 남다른 감정과 천주교에 입교함으로 하느님을 알게 되고 사람은 누구나 평등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자신은 양반 가문이며 백정의 딸인 삼천이를 구했다는 자부심은 결국 삼천이에게서 군림하게 된다.
신앙인이라는 자부심에서 남보다 다른 자신을 보여주고 싶었고, 백정의 딸을 자신이 구했다는 우쭐함은 부부간의 사랑보다 앞섬으로 병든 엄마를 두고 온 삼천을 위로하지 못했고 평생을 사랑 앞에 갈증을 느끼게 한다.
증조할머니의 딸인 할머니 영옥,
속초에서 영옥의 아버지가 이어준 결혼,
결국 남자가 중혼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영옥에게 사과 한마디 없이 본처에게로 돌아가는 남편,
그런 영옥에게 아버진 영옥의 탓으로 돌린다.
남자 하나 잡지 못한다는 이유로.
할머니 영옥은 미선을 낳아 혼자 힘으로 딸을 키운다.
할머니의 딸 엄마 미선,
무슨 이유인지 지연의 언니 정연을 잃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서 정연을 걷어내듯이 살아간다.
할머니의 말에 상처를 받아 할머니와 인연을 끊은채로 살아가지만 큰딸 정연에 대한 그리움과 그로 인해 받은 상처로 작은딸 지연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지 못한다.
엄마 딸 지연,
정성껏 지어준 식사를 하고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남편에게서 돌아서지만
'시간은 얼어붙은 강물이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모두 정해져 있다'는 전남편의 믿음처럼 얼어붙은 시간 속에서 몸부림친다.
정신병원에서 약을 구해 먹으며 할머니로부터 증조모에서 엄마에게로 이어지는 삶을 들으며 지연은 조금씩 자신을 찾게되며 엄마 역시 지연으로부터 정연이를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꺼내 놓게 된다.
그렇게 관계가 조금씩 회복되어 간다.
힘들게 살아가는 여인들의 삶과 달리 남자들은 또 얼마나 무책임한가.
삼천을 개성에서 데리고나온 증조부는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고 싶어 한다.
평생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고 감사해하는 몸짓을 원하지만 삼천은 표현하지 않는다.
결국 자기 연민과 자기 자랑과 자기만족으로 인해 스스로 행복하지 못한 증조부의 삶 역시 피폐하다.
'세상 사람들은 하느님 아래에 모두 평등하며 어느 누구도 더 존귀하거나 비천하게 태어나지 않았다. 존귀함과 비천함은 사람의 선택에 달렸으며 행동의 결과로 드러날 것이다. 증조모는 채 스물도 되지 않은 그의 그런 뜬구름 잡는 소리가 우스우면서도 듣기 좋다고 생각했다. 오리가 무리를 지어 지나갈 때 내는 소리처럼, 폭우가 호수 위에 쏟아지는 소리처럼, 바람이 길게 불며 나뭇잎을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처럼, 멀리서 들려오는 기차 소리처럼 증조부의 목소리는 증조모에게 다가왔다. 그때의 기억으로 증조모는 살아갔다'(p.253)
중혼을 한 영옥의 남편과 외도로 이혼을 한 지연의 남편,
그들은 미안하다는 소리만 지르고 진정한 사과는 하지 않는다.
사과를 하지 않음으로 상대방이 겪는 아픔과 상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말'로 인해 상처를 받고 상처를 주는 이들이지만 상처를 치유하거나 회복하려고 하지 않는다.
남자라는 이유로 외도가 당당하고, 집안 망신이라는 이유로 이혼이라는 말을 꺼내지 못하는 부모,
위로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결국 정신과를 찾을 수밖에 없다.
힘들지만 따뜻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새비네와 삼천,
누군가를 이해하고 위로가 되어준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이며 감사한 일인가.
내용이 질기고 비틀거려도 작가의 시선은 올곧고 따뜻해서 다행이다.
사람마다 다른 아픔을 가졌지만 아픔의 깊이만큼, 아픔의 무게만큼 표현해내는 감정선이 멋지다.
최윤영,
그의 팬이 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