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로 떠나는 영성순례
이어령 / 포이에마
이어령의 첫번째 영성문학강의
평생 문학을 사랑하고 공부해온 이어령이 다섯 편의 소설에서 찾은 인생의 길, 생명의 길
친정식구들,
옛날에, 모두가 가난하던 그 때에, 보통 사람들의 집 보다는 조금 더 가난했던 우리집,
남들이 흰쌀밥을 먹을 때도 보리밥을 먹어야 했고, 이웃집엔 쌀가마니와 보리가마니가 둥개둥개 쌓아올려질 때, 우리집엔 감자가 마당가득하게 널렸고, 남들이 누에고치를 하느라 잠실까지 지어서 누에를 키울 때도 작고 어두운 방에서 남들의 반도 되지 않은 누에를 키웠고, 겨울이라 남들은 따뜻한 아랫목에서 엉덩이를 지질 때, 가난한 아버지와 엄마는 두꺼운 얼음장을 깨고 닥나무 껍질을 벗겨 겨우내내 방안에서 닥나무 껍질을 벗겨내는 작업을 하셨었다.
그 때 내 소원은 우리 부모님도 겨울이면 한가하게 앉아서 수다도 푸시고 남의 집에 가서 늦도록 놀기도 했으면 싶었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일을 하는 부모님보다 텅 빈 방에 혼자 자유로운 영혼으로 들어서고 싶은 것이었다.
그렇게 가난하면서도 7남매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자기의 책을 읽으면 언니 동생들의 책을 읽었고 그것마져 몇번씩 통독한 후에는 아버지가 보시던 새농민을 뒤적거리기도 했었다.
핏줄이 그랬던가.
육촌오빠, 나보다 14살이 많은 큰집오빠는 귀한 孫이라 큰 집만 아니라 청안 이씨나 가문으로 결혼해서 들어온 며느리들에게까지 귀한 아들이었다. 귀한 아들이어서인지 어릴적 천연두를 앓아 얼굴전체에 곰보자국이 가득했지만 마음씨는 얼마나 좋았는지. 지금 생각하면 14살의 차이는 별 것도 아닌것 같은데 그때는 엄청나게 차이나는 오빠였다.
늘 공부를 점검하는 우리 큰오빠보다는 큰집오빠가 좋았던 이유는 뭐라고해도 야단한번 치지 않고 이뻐해 주셨기 때문인것 같다. 그런 오빠에게도 가장 사랑받는 동생은 무수한 여동생들 중에서도 단연코 나였으니... 오빠와 내 생일이 같은 날이었기 때문이다.
큰 집 오빠 또한 시골구석에서도 늘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책 읽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그 첩첩산중에서도 어디서 구했는지 문학전집이 오빠 방에 가득하게 꽂혀있었다. 책을 좋아하는 오빠는 누구도 책장에서 마음대로 책을 꺼내지 못하게 했지만 오직 나에게만은 마음대로 책을 읽어도 좋다는 허락까지 해주셨다. 덕분에 어중때기 중학생 시절에 남들은 보지도 못한 테스, 폭풍의 언덕,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등등의 세계문학전집을 거의 다 읽은 것 같다.
물론 머리에 남아 있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지만 책을 읽는 즐거움을 그때 깨달은 듯 하다.
다 잊어버렸지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교회가 국가속으로 들어와야지, 국가가 교회속으로 들어오길 기다려서는 안된다'는 글이 잊혀지지 않고 있다. 물론 정확한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이어령 문학평론가.
지식적으로 그보다 더 해박하신 분이 있을까 싶을만치 모든 면에서 뛰어나신 분이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시기 전에도 이미 성경에 대한 지식은 여늬 목사님 못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그런 분이 딸(이민아 작고)의 전도에 이끌려 교회로 나가게 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시고 세례를 받으셨다.
이후에 그 분의 글은 세상의 지식에 예수님에 대한 구원의 확신이 더해짐으로 영적인 풍요로움마져 깃들었고 이미 신앙생활을 하는 많은 사람들의 삶을 다시금 돌아보게도 하고 다잡게도 했음이 얼마나 감사한지.
소설로 떠나는 영성순례는 일반 소설을 소설자체로만 읽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적인 차원에서 영성을 느끼게 하며 우리가 알지 못한 신앙적인 관점으로 바라봄으로 재미로 읽고마는 소설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가는 문학강의이다.
오랜 신앙생활로 신앙인이라 자부하는 사람들조차 느끼지 못한 영성, 영성이란 교회에서 말씀을 들을 때나 찬양을 할 때, 기도나 성경을 묵상할 때만 알아지는 것이 영성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 가운데서도 영성이 살아있어야 하며 스스로가 느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예배란 주일날 교회안에서 한시간 드리는 것만이 예배가 아니라 우리의 삶이, 24시간 우리가 행하는 모든 행위들이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영성을 잃지 않으려는 자세이며 하나님앞에서의 나의 자세라는 것이 아닐까 싶어진다.
1.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죄인들을 위한 잔치)
2. 말테의 수기(도시인의 내면 풍경과 생명 찾기)
3. 탕자, 돌아오다(집을 떠난 사람만이 돌아올 수 있다)
4. 레미제라블(혁명이냐 사랑이냐)
5. 파이 이야기(생명이란 이토록 기막힌 것)
위에 나열된 소설을 토대로 하여 문학강의가 시작되고 강의 중간중간에 예수님이라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면, 아무 생각없이 읽어가는 소설에서 느끼는 영성의 힘을 세세히 설명을 해주신다.
또한 처음부터 끝까지 모범적으로만 살아야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며, 탕자처럼 집을 떠나본 사람만이 진정 집에 대한 소중함을 느끼고 이전보다 더욱 사랑하게 된다는 사실을 설명해 주신다.
소설이란 소인들의 이야기이며 한결같이 범속한 일상사의 연속이기 때문에 먼 나라의 사람들 이야기가 아니라 곧 우리의 이야기임을 가르친다.
다섯 편의 소설을 통해서 알게 되는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목적, 우리가 기적이라 말하는 소경이 눈을 뜨는 것과 앉은뱅이가 일어나서 걷는 것이 기적이 아니라 영원히 죽을 수 박에 없는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기적임을 상세하게 가르쳐주신다.
다섯 편의 소설을 각각의 부제로 강의를 하시지만 결국엔 '예수님은 生命이며 사랑이시다'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결국은 예수님의 생명과 사랑이 우리를 살게 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또한 영성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것이 아니라 끊어진 관계를 이어주는 예수님을 인정하고 쉽게 절망하지 않고 다시금 일어설 수 있는 한 줄기의 빛과 한줌의 공기같은 것임을 잊지 않아야겠다.
'가족애가 사회적인 형제애가 되고, 형제애가 인류애가 되는 것이 인종을 떠나 하나님의 생명력 아래서 세계 모든 사람이 평화를 이룰 수 있는 길이라는 기독교 메세지가 그대로 작품속에 녹아 있어서, 우리는 가브로슈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p.289)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낙심하여 뒤로 물러나지 않을 때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빛과 한 줄기 바람, 공기,
그것을 우리는 영성이라 부릅니다.
흔히 영성이라는 것은 밝고 큰 빛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한 줄기 작은 빛으로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그러한 영성이 있기 때문에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출구를 찾아갈 수 있습니다'(p.77-78)
이어령 선생님,
부디 건강하셔서 앞으로도 좋은 강의로, 좋은 글로 우리로 하여금 빛을, 공기를, 바람을, 그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거룩하심과 선하심을 느끼게 해주시길 간절한 마음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