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잠든 늦은 밤,
잠 못 이루며 뒤척이는 갱년기의 어느 여자들까지도 겨우 잠든 그 야심한 시각에,
바람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모습으로 조용히 담을 넘어 누군가의 귀중한 것을 살짝 들어내는 도둑처럼,
시간은 그렇게 소리없이 살금살금 내게로 파고든다.
'받아 놓은 날은 금방 온다'고 말하던 명옥언니의 말처럼, 아직은..이라고 여겼던 8월 24일은 나의 애타는 마음과 쩔쩔매는 마음과, 마치 신부가 된 듯한 긴장감으로 땀을 쏟아내는 나에게 한치의 양보나 거슬림없이 다가온다.
애써 구한 집에 신부측에서 살림살이를 들여왔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 토요일 남편과 동생과 함께 햇반과 라면과 짜파게티와 여러종류의 햄과 김, 샴푸와 퍼실, 퐁퐁과 수세미와 행주, 도마와 칼과 쌀과 혼합곡.. 등속의 것들을 준비해서 다녀왔다.
작은 집에 가전제품은 어찌나 큰 것을 들여놓았는지.
커다란 냉장고와 15KG의 세탁기를 보고는 '우리집 것과 바꾸자'고 농담도 던져 보았다.
물론 커다란 가전제품 덕분에 다용도실은 돌아서기도 불편하고 두개의 방엔 사람보다 물건이 더 크게 자리하기 때문에 좁은 집안이 더욱 좁게 여겨졌지만 한편 흐뭇하기도 하고 든든하기도 하다.
'이제는 저들만의 세계가 펼쳐지고 그 세계를 내가 간섭하지는 않아야한다'는 생각이 각인처럼 내 마음속에 콕 박힌다.
신혼살림을 시댁에서 살아야했던 나는 아들의 신접살림이 신기하기도 하고 예쁘기도 하고 이유없이 내가 행복하기도 하다.
주현이와 성희가 오래도록 건강하고 예쁘고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할 뿐이다.
살림집을 구경하고나니 이젠 정말 주현이를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내 명치끝에 가시가 박히듯이, 싸아한 아픔이 땡볕속에 불어오는 여름바람같이 마음을 휘젓는다.
세현이가 집에 없으니 주일저녁이 아니면 따로 시간을 낼 수 없을 것 같아서 주일 오후예배 후 저녁식사를 함께 하기로 했다.
세 남자와 한 여자가 함께하는 시간이 이제는 쉽지 않으리란 생각에 어쩐지 쓸쓸하다.
입이 까디롭기는 대한민국 1% 안에 들어가는 주현이가 다행히 고등어구이와 제육볶음을 잘 먹어서 평소에 가끔 들리는 금남리 청국장 정식집 '너와집'으로 향했다.
청국장과 고등어 구이와 제육볶음과 여러가지 밑반찬이 입맛을 돋우는 너와집에서 식사를 하고 '일피노'로 자리를 옮겼다.
'가문의 영광1'에서 김정은이 피아노를 치며 '나 항상 그대를' 부르던 그 집이다.
분위기 있고 이상한 이름이 다닥붙은 커피를 고르는 것은 역시 젊은 아들들의 몫이다.
10년전에 숙희와 현숙이와 경숙이와 함께 일피노에 와서 아무것도 모른채 셋은 '에스 프레소'를 주문하고 경숙이만 아이스크림을 주문했던 기억, 에스프레소의 쓴 맛과 진한 맛 때문에 결국 마시지도 못하고 킥킥거리다가 그냥 두고 나왔다는 이야기에 아이들이 기가차다는 표정이지만 어쩌랴. 인생 다 그런것을..
여전히 야리꾸리한 이름과 커피의 조화를 모르는 남편과 나는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는데 세현이가 들고온 쟁반에는 이상한 색깔의 커피인지 뭔지가 있기에 뭐냐고 물어보니 대답은 했지만 나는 이해불가이다.
커피를 마시며 결혼을 앞둔 주현이의 심정을 들으니 주현이 또한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한달 사이에 4kg이나 살이 빠졌다고 한다.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의 심정을 알기에 가능하면 스트레스를 주지 않으려 애썼는데 나름대로 스트레스가 있었나보다.
결혼준비 때문이냐고 물으니 그건아니고 살아갈 일과 여러가지 일들이 스트레스로 작용하고 거의 매일을 용인과 남양주를 오가고 직장 일 또한 바쁘기 때문이란다.
형을 위하여 세현이와 여친이 결혼축하금으로 100만원을 통장으로 넣어준다는 말에 내가 고맙다.
부담스럽다며 거절하는 주현이에게 동생이 하고 싶어할 때 부담없이 받으라고 하니 이 다음에 갚을 것이 걱정이란다.
돌려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결혼하는 형에게 선물하고 싶다는 세현이의 마음은 받아주리라 여기며..
어린시절의 이야기, 친척들의 이야기, 친구들의 이야기..
두런거리며 이야기를 주고받으니 정말 이제는 내 자식이기보다는 성희의 남편이라는 생각이 확실해진다.
부디 잘 살아주기를, 그것만이 우리의 소망 전부이다.
30년간 우리곁에서 기쁨과 슬픔과 아픔을 동시에 안겨주었던 아들,
가끔 나를 화나게 하고 분노케 하고 좌절케 하고 억울케 하고 죽음을 생각하게 만들던 아들,
그러나 더 많은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함을 안겨줌으로 나의 자존감을 키워주었던 아들,
처음으로 내게 엄마라 불러주었던 아들, 처음으로 나와 눈을 마주치며 눈웃음을 날리던 아들,
얼굴 전체에 사랑한다며 뽀뽀를 퍼부어대던 아들,
내 모든 기도속에 한번도 빠지지 않고 얼굴을 디밀어 하나님께 부르짖게 하던 아들,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하다며 작은 두 팔을 벌려 하늘을 그리고 땅을 품던 아들,
10원만 주면 너랑 바꾼다는 내 말을 유쾌한 농담으로 받아들일 줄 알던 아들,
말을 듣지 않으면 고추를 따버리겠다는 농담을 버릇처럼 주고 받던 어느 날, 내 얼굴앞으로 바지를 들이대며 따보라던 그 행복했던 순간들,
그 모든 것들을 내 마음속에 그리움으로, 커다랗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만들어 놓은채 이제 자신의 삶을 찾아서 떠나는 아들,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은 그들의 행복한 삶을 위하여 지켜보며 더 많은 눈물의 기도 뿐이란걸 명심한다.
사랑하는 아들 주현아^^*
행복하고 아름다운 천국의 모형을 이루는 가정이길 기도한다.
너의 가는 길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으시기를...
2013년 8월 21일 사랑하는 엄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