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눈이 부시게 푸른 날들이다.
'초록이 짙어 단풍든다'는 윤동주 님의 '푸르른 날'의 싯귀가 저절로 떠오르는 계절,
낮은 자세로 무덤가에 오롯이 돋아있는 풀들, 쑥이며 잔디며, 쑥부쟁이며, 민들레며 제비꽃...들을 들여다보니 초록이 짙어져 물러설 수 없으므로 고운 색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보며 다시금 푸르른 날을 중얼중얼 해 본다.
10월들어 조금 바빠진 사무실로 인해 책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운동도 제때에 하지 못한 날들이 지나갔다.
육신적으로 힘이들고 시간에 매인 날들이지만 늘어가는 일감은 오히려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경제적인 불황이 시국을 지배하는 요즘, 단 며칠간이라도 불황을 탈피한다는 사실은 육신의 배부름에 만족함을 가져다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말이다.
보름간의 일상으로 몸도 마음도 조금씩 지쳐갈 때, 동해안에 가득한 바다내음을 맡으며 비릿한 생선들의 비늘들을 긁어가며 눈앞에서 회로 조각나는 물고기들이 구미를 당기게 한다.
작은 사무실이라고 하지만 토요일 하루 문을 닫고 여행을 간다는 것이 결코 쉽지가 않다.
하룻동안에 손님들이 들이닥쳐서 일이 많아서가 아니라 명함 하나라도 들고 사무실앞까지 왔다가 돌아설 누군가의 발길이 한번의 헛걸음으로 돌아서지 않을까, 맡겨놓은 물건을 찾으러 왔는데 내려진 철셔터가 그들의 마음까지 내리게 하는 것은 아닐까..
마음이 약한 것인지, 자신감이 부족한 것인지, 아무튼 환한 대낮에 셔터문을 굳게 내려야 한다는 사실을 아직 우리부부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살아간다.
우리부부야 주인이니까 그렇다고 하지만 옆에 살고있는 동생역시 언니네 사무실이 일요일도 아닌 토요일에 문을 닫아건다는 사실이 쉽지 않은 모양인가 보다. 아무것도 모르지만 '내가 보고있을테니 다녀오라'는 말에 청안 이씨의 의리와 사랑의 두께를 가늠하며 모든걸 동생에게 맡기고 금요일 퇴근 후에 속초로 향했다.
하루전에 속초로 결혼기념여행을 떠난 이경자집사로부터 단풍철이라 속초에 숙소가 마땅치 않다는 말을 듣고 주문진으로 향했다.
우리부부는 속초보다는 주문진이 편안하고 익숙하기 때문에 늘 주문진에서 장을 보고 회를 먹고 백세주를 마시곤 한다.
늦은 시각에 도착하니 피로가 엄습하고 밤바다이든, 백세주이든, 물회이든 세코시든 모든게 귀찮아 잠 속으로 밀어 넣었다.
늦은 아침에 주문진 시장에 나가 젓갈(명란, 오징어, 청어알)을 사고 아들과 남편이 가끔 맥주 한잔씩 하며 질기게 씹어대는 쥐포 한봉지를 사고 새우젓을 사고는 난생처음 곰치국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전날 울산바위를 다녀왔다는 이경자 집사와 통화한 후, 양양 죽도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해안도로를 달려 양양으로 가는 가을아침은 평화롭기만 하다. 수많은 사람들을 씻기고 놀이터가 되어준 동해바다는 어느새 자신의 몸까지 말갛게 씻어 바닷물속에 모래와 물고기와 바위까지 환하게 보여줌으로 우리 마음속 찌끼까지 끌어내게 한다.
주문진에서 30분을 달려가니(가는 길에 구경도 하고 커피도 마시고) 양양 현남에 있는 죽도에 도착했음을 네비가 알려준다.
넓은 공간에 마음대로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엔 주차요원이 안계심으로 기분이 좋고 주차장옆으로 보이는 방파제와 하얀휀스가 어쩐지 청아한 가을날과 닮았다는 인상을 풍긴다.
휀스길로 들어가니 바위가 또 가관이다.
누군가 드릴로 뚫어도 만들지 못하는 모양들, 모래로 쌓은 것도 같고, 훌륭한 조각가가 오로지 그것에만 매달려 만들어 놓은 것만 같은
바위들, 이상하게 생긴 바위들을 지나니 저절로 감탄사가 연발한다.
널찍한 바위와 바위아래 낚싯군들, 그리고 코발트빛의 바닷물...
바위위에서 한참을 기다리니 이경자 집사 부부의 모습이 보인다.
일주일에 몇번을 만나는 얼굴인데, 어제 본 그 얼굴이건만 왜 이다지도 반가운 것인지.
이산가족 상봉은 '저리가거라.'.이다.
두 가족이 함께 죽도를 한바퀴 돌아보고 다시 작은 산으로 향하는 길로 들어섰다.
아기자기한 테크로 만들어진 계단을 올라가니 긴 의자와 커다란 소나무가 아름드리 서 있다.
정상에는 운동기구와 함께 나무로 만들어진 탁자가 누군가를 사무치게 기다리는 듯하다.
몇번을 지나친 길이지만 여기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숨어있을 줄에야..
특히 자연을 좋아하는 이경자 집사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더욱 좋아진다.
밝은미소님의 블로그에서 보고 무턱대고 '죽도에서 만나자'라고 했으니 염려가 되었던 것이 사실인데
생각보다 훨씬 아기자기하고 깨끗하고 볼거리가 많은 죽도를 만나니 권사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어진다.
돌아오는 길에 물치항에서 서로 싸우면서(?) 회를 사겠다는 남자들중에, 기어히 양집사님이 회를 사셨다.
방어와 고등어와 우럭과 광어와 오징어까지. 혼자서 반 이상은 먹은 듯하다. 고소하고 쫄깃하게 씹히는 맛이 아직도 입안에서 맴맴돈다.
회를 먹으며 소독이 필요하여 딱 한잔씩의 알콜을 드신 서방님들 대신 두 여자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운전하며 되돌아오는 가을 길은 여전히 곱고 아름답기만 했다.
죽도에 가시려거든 '죽도방파제'라고 네비에 치시고, 양양군 현남면으로 가셔야 함을 잊지 마시길..
강원도에 가시거들랑 꼭 한번 들려보세요.
절대로 후회하시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