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도무지 끝이날 것 같지 않던 무더위가 하루아침 태풍이 지나고나니 어느새 도둑처럼 이불을 살며시 끌어올리게 하고 긴팔의 옷을 찾게 한다.
풍성하고 기쁨이 충만한 가을이 내게 찾아오는 모습은 스트레스와 함께이다.
한달전 남편이 배드민턴을 치다가 무릎을 삐끗해서 수술을 해야하느니 어쩌니 하더니 다행하게도 수술을 하지 않고 서너달 조신한 몸으로 살면서 물리치료와 약물치료를 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그러므로 인해 나는 남편의 리모콘이 되고만, 꼼짝할 수 없는 신세가 되었으니, 조졌다고나 할까나..
지금은 웬만큼 걷는데 불편함도 없고 오토의 자동차는 단거리 운전도 하지만 처음 3주간은 출퇴근은 당연한 일이고,
" 물 여기, 밥 여기, 신문은 여기요, 핸드폰은 요기요, 수건은 여기, ... acac...ccc"
가능하면 인상쓰지 않으려 애쓰며 리모컨의 역할을 감당하다보니 내게 남는건 은근한 스트레스이다.
아침 출근채비를 하면서 설겆이를 해야하고, 저녁에 집에가서 혼자서 식사준비며 세탁이며 청소까지 감당해야 함은 물론이고,
일주일에 한번씩 하는 분리수거까지 온통 내 차지이고 보니, 머슴인지, 무수리인지, 마누라인지, 정체성이 모호하다.
일찍부터 맞벌이를 해서 아침준비를 하고 식사를 마치면 남편이 뒷설겆이를 하고, 저녁엔 내가 설겆이를 하면 남편이 세탁물을 널고 걷고 개키고 한다. 분리수거는 당연히 남편이 하는 일이고..
그런데 이 모든걸 감당하려니 모든게 귀찮고 피곤하고 지친다.
책도 읽지 않고 컴도 들여다보지 않고 일이 아니면 그냥 멍 때리며 시간을 보내는 날들이다.
오죽하면 몇년간 불면증으로 밤을 꼬박 새우던 일이 하루아침에 확~ 고쳐져서 요즘은 9시뉴스가 끝나면 바로 잠~~이다.(요건 다행)
토요일,
그동안의 스트레스를 한번쯤 날리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은 마음에 오전일을 마치고 양평 소나기마을로 향했다.
양평 소나기마을은 준비단계부터 관심을 가졌는데 한번도 가지 못한 마음은 숙제를 마치지 못한 학생의 마음같았는데 이제서야 가게 되었다.
우리집에서 9km의 소나기마을은 춘천고속도로의 등장으로 시간을 30분이나 단축시킨다.
화도ic에서 서종ic까지는 5분의 거리인데 톨비는 1600원이라 비싸도 너~~무 비싼 느낌이지만 돌아서 가려면 기름값이 그 정도는 들어야 할 것 같아 억지로 분노를 삼키며 이해하기로 했다.
서종ic를 나가면 바로 황순원의 소나기마을이란 이정표가 보이고 그 길을 따라서 가다보면 첩첩한 산골에 '소나기식당'에서 부터 '소나기펜션'에 이르기까지 온통 소나기란 이름의 가게들이 즐비하다.
'가는 날이 장날' 이라고 마침 소나기마을 문화축제가 열리는 첫날이다.
초중고생들의 백일장과 조성모와 갱키즈, 경희음대생들과 직장인 가수팀이 나와서 공연을 하는 덕분에 콘서트까지 구경하게 되었다.
글을 제출한 학생들은 어느 시인의 강연을 들으며 9월의 땡볕이 쏟아지는 잔디밭에서 우산을 쓰고, 모자를 쓰고 손부채를 이용해 경청하고 있고 학생들을 따라온 부모들은 의자에 누운채로, 잔디밭에 길게 뻗은채로 가을을 맞이하고 있었다.
다리아픈 남편을 입구에 내려놓고 우리는 소나기마을을 둘러보았다.
소설내용처럼 곳곳에 장식물을 만들어 두고, 길을 만들어 놓음으로 소설속으로 들어가게 만들어 놓는다.
황순원문학관,
어느 문학관이나 마찬가지로 작가의 서재와 대표작품이 전시되었고 특별히 황순원 선생님의 묘비가 함께 있어서 좋다.
또한 소나기마을의 소설을 주제로 학생들에게 매년 백일장과 함께 그리기대회를 함으로 입상작품을 전시해 놓았는데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학생들이 그린 소나기마을의 강렬한 인상들이 눈에 확 들어온다.
이어진 문화행사에는 직장인들이 만든 가수팀들의 노래와 경희음대생들이 부르는 노래는 가을 분위기를 최고조로 만들고
갱키즈란 걸그룹이 나와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니 나이가 많든적든 남자들의 얼굴이 헤벌쭉~해진다.
정신을 놓은 남자들이 겨우 수습할 때 조성모의 등장은 역시 나이를 떠난 여자들의 아우성을 가을하늘까지 퍼지게 만들었으니,
물론 우리자매의 목소리도 우렁차게 보태졌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조성모의 노래를 들으며 분위기에 젖어 들다보니 어느새 내 마음까지 힐링이 되어지는 것 같다.
코스모스와 벌개미초와 가을국화들이 어우러진 길, 파란잔디가 노릇한 빛을 염려하는 시간, 가을하늘의 흰구름이 더 높은 곳을 바라보는 그때, 우리는 오던 길에 봐 두었던 메밀음식점으로 들어가 메밀묵밥과 메밀칼국수를 먹으며 즐거운 하루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