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 큰 남자를 보면
문 정 희(1947~ )
키 큰 남자를 보면
가만히 팔 걸고 싶다
어린 날 오빠 팔에 매달리듯
그렇게 매달리고 싶다
나팔꽃이 되어도 좋다
아니, 바람에 나부끼는
은사시나무에 올라가서
그의 눈썹을 만져보고 싶다
아름다운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그의 눈썹에
한 개의 잎으로 매달려
푸른 하늘을 조금씩 갉아먹고 싶다
누에처럼 긴 잠 들고 싶다
키 큰 남자를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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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해빠진 여름비가 내렸다 쉬었다가..
잊은듯이 다시 내리곤 하던
1983년 7월 24일
여름성경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내게
동생이 남자를 소개시켰다.
'언니 마음에 들면 얘기하고 싫으면 그냥 와'라는 조건으로..
동생과 석관동 다방구석에 아무렇지 않은듯이
지나는 휴일에 사이좋은 자매가 커피 한잔을 나누듯이
소곤거리며 키득거리고 있을 때,
엷은 소라색 반팔 남방에
짙은 베이지색의 면 바지를 입고
할아버지처럼 긴 장우산을 손에 들고
다방문을 밀치고 친구에게 다가서던 남자,
남자치곤 선한 얼굴에
남자치곤 자상한 웃음을 얼굴가득히 담은채로
눈웃음을 지으며 내 눈에 들어왔던 남자.
무엇보다 큰 키가 작은 눈에 들어왔던..
지금도 앞서가는 남자의 모습을 보다가
오종종 달려가 팔을 걸어 놓는다.
키 큰 남자의 하늘을
누에처럼 조금씩 갉아먹어버린건 아닐까.
그의 꿈을, 부푼 희망을...
키 작은 여자의 쫑알거림은 오늘도 여전하다.
'허우대만 멀쩡하지 속은 텅 비었잖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턱 아래 닿는다는 내 키가 더 작은것 같아서리...
키가 작은 여자가 좋다는
키가 큰 남자는 여전히 작은 나를 내려다 보며
선한 웃음을 뵌다.
속이야 새카맣게 타들어가는지 마는지
나를 향한 그의 웃음이, 손짓이
푸른 하늘로 보내는 나의 웃음소리에
볼륨을 높이는건 확실하다.
(진옥이의 한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