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워 내 기
정 진 규(1939~ )
우리집 김장날 내가 맡은 일은 항아리를 비워내는
일이었다 열 동이씩이나 물을 길었다 말끔히 말끔히
가셔내었다 손이 시렸다 어디서나 내가 하는 일이란
비워내는 일이었다 채우는 일은 다른 분이 하셔도 좋았다
잘하는 짓이라고 신께서 칭찬하셨다
요즘 생각으론 집이나 백 채쯤 비워내어 그 비인 집에
가장 추운 분들이 마음대로 들어가 사시게 했으면 좋겠다
이 겨울을 따뜻하게 나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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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수선한 김장날,
빨간고무장갑을 끼고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는 이,
구부린 허리를 툭툭 두드리며 하늘을 향하는 눈길,
누군가 깨끗하게 부셔놓은 항아리에
누군가 야문 배추포기를 꼭꼭 채워담는 일,
채움이란,
충만함이란
나를 비워내는 거라고 하던데...
비우고 비우고 또 비움으로
충만하게 채우는 거라고 하던데..
채워짐을 알기에 비우는 건 아닐거야.
내 속에 든 욕심을 비우고
나를 할퀴는 욕망을 비우고
비만케 하는 탐심을 비우고
비우고 비우고 ..또 비우다보면
어느새 맑고 정갈한 무엇이 나를 채우리라.
곱던 나뭇잎이 길바닥에 엉키고
후미진 그늘의 도랑에 쳐박히고
그래도 그 나무의 잎임을 기억하고..
비워냄으로 새 봄을 기다리는 용기있는 나무를 보자.
이 겨울도 견딜 수 있으리니..
백채쯤 비워내어 가장 추운 분들이 따뜻한 겨울을 났으면
좋겠다는
시인으로 하여금 내가 먼저 따뜻한 날에...
(진옥이의 한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