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 불
오 세 영(1942 ~ )
주렁 주렁 열린 감,
가을 오자 나무들 일제히 등불을
켜 들었다.
제 갈 길 환히 밝히려
어떤 것은 높은 가지 끝에서 어떤 것은 또
낮은 줄기 밑동에서
저마다 치켜든
붉고 푸른 사과 등,
밝고 노란 오렌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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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라 나무들도
밤의 먼 여행을 떠나는 낙엽들을 위해선
이처럼
등불을 예비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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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의 때,
이른새벽, 보리쌀을 끓여 밥을 시작하는 엄마의 새벽은 늘
미명이었다.
첫 닭이 울었을 즈음,
도시의 어느 집에서 신문이 마당에 떨어지기도 전,
부잣집 대문간에 매달린 길다란 주머니에 하얀 우윳병이 담기기도 전,
새벽기차가 먼먼 기적소리를 울리며 끝없는 철길을 달려올 때쯤
광목의 흰 앞치마를 두른채,
간밤의 단잠으로 새로운 날을 시작하는 엄마는
졸음없는 맑은 낯으로 식구들의 아침밥을 위해 우물로 달리고
나직나직한 음성으로 동네아낙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던 그때,
커다란 바가지를 들고 감을 줍기 위해 엄마와 함께
푸르른 신새벽을 달리는 나를 보고
'아이고, 옥이는 참 부지런하네'
라며 기특해 하셨는데..
탁 탁 떨어진 감들을 줍던 가득한 마음이
오늘아침 풍성한 추억으로 나에게 다가들고
잘 익은 감을 먹으며 이제는 등불을 먹는 기분에
어쩌면 내 속이 시뻘겋게 타버릴지도 몰라.
부지런한 나를 칭찬하시던 엄마의 동갑내기 동무들,
숙희엄마와 육희엄마는 이미 다른 세상으로 떠나시고
몸의 구석구석이 당신의 의지와는 별개인
팔순을 바라보는 엄마는 오늘도 그 우물을 지나치며
어린 딸의 모습을 기억하고 계실테지.
(진옥이의 한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