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잘하게 피어나던 잎새가 어느덧 난무한 바람들속에서 몸짓이 부풀어 올라 나뭇잎이 되어 작게나마 그늘을 만들고, 연한 빛깔의 나뭇잎들이 반짝거리는 햇빛을 수천개로, 수만개로 나뉘면서도 마냥 즐거운 듯 팔랑거리는 오후, 비죽하게 가지를 뻗은 찔레나무는 초록의 줄기위로 빨간색의 가시를 몸에 붙임으로 누구도 근접할 수 없는 완강한 거부의 몸짓을 내보이며, 찔레덩쿨아래서 가늘게 자라던 원추리는 어느새 억센 모양의 이파리가 손으로 갖다대면 살을 벨 것 같은 날카로움을 느끼게 하는데...
반질한 알밤을 맺기 위해서 과정의 일환으로 밤꽃을 피우기 위하여 준비중인 커다란 밤나무 아래로, 찔레덩쿨 아래로 갖가지의 꽃들이 제각기 피어나는 흙덩어리 위로, 어디쯤에선가 뱀이 징그러운 모양으로 꿈틀거릴것만 같아서 한발짝도 오르질 못하는 바보가 되어 그저 눈으로만 훑어내리며, 마음으로만 느끼며, 이는 가슴으로만 바라보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또한 입으로만 찬양하는, 어쩌면 게으르기 한이 없는 나를 발견하는건 부끄러운 자화상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이웃들의 아픔을 무심하게 여기며 지나치는 안일함은, 여상한 일상의 내 안녕과 바꾸고 싶지않은 욕심일 수도 있으며, 그 아픔이 내것이 아님에 안도하는 하찮은 인간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아들같은 청년의 주검에서 느꼈던 애절한 통곡과는 다르고, 친구같은 집사님의 놓지 못한 안타까움에서 느끼던 주검과는 또다른 무엇이 나를 휘감는다.
늘 나에게 상추며, 배추며, 파를 가져다 먹으라고 말씀하시던 모습, 술이 취한 모습은 그렇지 않을때보다 훨씬 더 많았음을 알기에 더욱 안타까운지도 모른다. 술이 취한채로 혀가 감겨 올라가고, 부리부리한 눈가에 눈곱이 젖은채로 끼어있던 모습도, 누런 치아를 드러내며 허허 웃으시던 모습도, 우리 우진엄마 잘봐주라던 지극한 아내사랑도, 어느가을날, 하루종일 나무를 심은 댓가로 받은 일당을 아줌마에게 찾아와 건너던 모습, 맛있는 것 드시라며 만원권을 건네시던 모습.... 아! 8살아래의 아줌마가 바람이라도 피울까봐 늘 전전긍긍하던 아저씨.. 지금쯤 마음이 놓이실까, 저 세상에서도 아줌마에 대한 마음을 놓지 못함으로 끙끙대는건 아닐지...
갑작스런 부음은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10년을 같이지낸 아줌마에 대한 나의 마음이 어떤건지를 가르쳐 주었고 이미 운명을 달리하신 아저씨보다 혼자남은 아줌마가 더욱 안쓰러움으로 여자로서의 삶의 버거움을 깨우쳐 주는건가 보다.
같은 길을, 같은 속도로, 같은 일을 하기 위하여 자박자박 걸어오는 아줌마를 보는순간, 땅에 박은듯한 발자국들이 왜그리도 서러운지, 작은 체구가득가 어쩜 그리도 외롭고 서러운지, 눈길이 닿은 부분마다 무엇이 그토록이나 서럽게 울게 만드는지,,,
TV를 보는중에도 옆에 여전히 아저씨가 앉아 있는 듯하고, 셋이서 마주하던 식탁에 문득 두 여자만이 덩그랗게 앉아있음을 깨닫고는 할머니와 함께 밥숟가락을 놓아야 하는 아줌마, 시어머니가 서러울까봐 울지 못하는 며느리와, 며느리의 외로움과 서러움 때문에 울음을 삼켜야 하는 시어머니.
혼자 잠을 자기가 두려워 시어머니와 나란히 누운채로 잠을 청하는 젊은 여인은 앞으로 긴긴 밤을 무서움으로 또한 어이할지.. 시간이 흐른 뒤 찾아드는 외로움을 또한 어이할지. 그 너머에 찾아들 설움을 또한 어이해얄지..
며느리가 보이지 않는 밭에서 파를 뽑으며 울고, 얼마전 아들과 함께 심어놓은 고추에 버팀목을 세우며, 같이 세울 아들이 이미 당신보다 먼저 저 세상에 간 것에 대한 애통함보다, 홀로남은 며느리가 가엾어 울어야 하는 시어머니의 절여진 배추보다 더 절인 가슴속 울음들..
너무 쉽게 놓아버린 당신의 목숨이야 당신이 그렇게 했다지만 남은 이들의 서러움을 왜그리 헤아리지 못했을까, 홀로된 며느리 때문에 애닯은 어머니를 생각하지 않고, 아직도 젊은 아내의 긴 외로움과 설움을 왜 생각하지 않았을까, 2개월 남은 군생활을 끝내고 돌아와 할머니와 부모님과 같이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틈만나면 전화하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왜 생각하지 않았을까 ... 너무나 무심하고 무정한 아저씨... 명복을 빌기보다 원망이 먼저임은 그들의 삶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리라.
일주일만에 출근한 아줌마의 모습이 자꾸만 가슴 아프고, 아직도 선명한 아저씨의 어진 모습과 술에 절인 모습이 또한 금새라도 다시 뵐 수 있을것만 같으다.
오월은 윤기를 흘리며 어디 한곳도 부족함이 없이 아름다운데 인간만은 왜 이리도 서늘한 서러움을 느껴야 하는지.
아무 쓰잘데기 없다는 아카시아가 꽃을 피우기 위해서 한들거리고, 가시로 중무장한 찔레꽃도 꽃을 피우기 위해서 하늘을 바라보며 햇살을 누리는데,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막막한 내 마음에도 바람이 지나고 오월의 밝은 햇살이 축복처럼 퍼졌으면 좋겠다. 하찮은 염려로 인하여 마음이 가라앉으며, 내일에 대한 걱정으로 내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는 일이 없었으면 좋으련만.
여전히 싱긋한 바람은 내 얼굴을 지나고 내 마음을 휘저으며 시간속으로 스미는 것을....
그나마 좋은 계절 좋은 날씨에 저 세상으로 가신 아저씰 생각하고 홀로남은 아줌마를 안타까워하며, 또한 아저씨의 명복을 빌며.
2003년 5월 16일 오후 4시에 진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