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록담
속밭 대피소
코로나 19는 나를 지치게 만들고, 포기하게 만들고, 단념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24시간 같이 지내는 서방과의 사이도 한계를 느껴 숨이 막힐 것 같은 답답함과 쳐다보면 짜증스럽고 말소리도 소음으로 들리기 시작한 지가 좀 되었다..
10월 중순에 만난 친구들과 제주도엘 가자는 말이 나옴과 동시에 예매를 하고 한라산을 찍었다.
한라산을 오른다는 생각으로 열흘간의 시간은 스트레스 대신 설렘으로 바뀌었고, 순간처럼 다가온 20일은 가을볕처럼 따사롭다.
첫비행기를 타기 위해서는 남양주에서 공항 첫 버스가 위태롭고, 다음 비행기를 타기엔 만원 한 장을 얹어야 하는 것이 몹시도 아깝게 느껴진다. 결국은 서방에게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으니 아무래도 나와 마찬가지로 긴긴 시간들이 답답하고 갑갑하여 숨통이 조였음이 확실하다.
민경 권사가 재승이와 같이 가고 싶은데 용기가 없어서 못 갔다며 재승이를 동행했다.
늦둥이 재승이는 평내교회 교인 모두가 알고 있고 또한 사랑하는 어린이지만, 나는 거기서 좀 더 특별하게 사랑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가 사랑한다는 사실을 재승이 역시 잘 알고 있다.
제주공항에 내리니 가슴 속에 응어리로 남아서 돌덩이가 된 덩어리가 체증이 풀린 것처럼 내려가고 가슴속으로 한라산의 가을바람이 스며든다.
롯데 렌터카에서 차 키를 건네 받고 운전기사를 자원해 준 선집사가 핸들을 잡는다.
매사에 차분하고 민첩하며 판단이 빨라서 안심한다. 역시 선생님은 선생님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든든하다.
화요일 아침이라 넉넉하게 성판악 주차장에 미끄러지듯이 폼나게 들어가려던 생각은 꿈이었을 뿐이고, 성판악 근처에 가니 길가에 자동차가 일렬로 끝이 보이질 않는다.
'여호와 이레'를 외치며 들어간 주차장, 공평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헛된 바램은 거절하심이 맞다. ㅎㅎ
재승이와 민경이를 내려놓고 주차를 위해 선집사와 큰길로 들어서니 도무지 끝이 보이질 않는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어 그 길의 끝에 주차를 하고 헉헉대며 돌아오는 길에 성판악 주차장 300m라는 글씨가 떡~ 버틴다.
9시부터 산행을 시작하여 여유롭게 진달래 대피소 12시 반에 도착을 하고 정상으로 향하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우물쭈물거리는 아줌마들이 불안한 재승이는 안지도 못하고 쉬지도 못한 채 "12시 반에 도착해야 하는데"를 들릴락 말락한 소리로 불안한 마음을 대신한다.
한라산을 향하는 길,
아뿔싸!!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으니 나의 싱싱한 두 다리께서 움직이질 않으신다는 것이다.
속밭대피소를 지나고 진달래대피소를 향할 때부터 다리는 천근이요, 마음은 만근이다.
한라산 등반을 위해 아빠와 하루 1시간 30분씩 걸었다는 재승이를 실망시킬 수 없는 것이며, 쨍쨍하게 오르는 민경이를 배신할 수도 없으며, 매일 산행을 하여 다리 근육을 키워 날아오를 듯이 오르는 선집사를 배반할 수가 없으니...
민경이가 뒤에서 걷다가 어느순간 산집사가 뒤에서 나를 보호한다.
맙소사~~ 세상에 이런 일이~~
진달래 대피소에서부터는 계단이 많고 돌덩이가 많음을 알고 있다. 지난번 서방과 왔을 때 포기한다고 하던 서방이 이해가 간다.
몇 계단을 오르고 쉬어야 하고 다시 몇 개를 오르고 쉬어야 하는 반복 속에 보이는 한라산 정상이 마치 천국으로 가는 계단 같아 보인다. 나를 위해 보조를 맞추는 선집사에게 먼저 가라고 간곡히 부탁을 하니 선집사가 그제야 앞장을 서서 훠이훠이 날아오른다.
천근의 무게인 다리를 질질 끌면서도 포기하기는 싫은 것이 또한 이진옥이가 아닌가 말이다.
셋이서 백록담을 배경으로 인증샷을 찍고 감탄을 하고, 장하다는 뿌듯한 웃음까지 넉넉하게 감당한 세 사람 앞에 할딱거리는 모습으로 나타나 컵라면과 김밥을 먹은 다음에야 아무렇지 않듯이 웃는 얼굴을 하며 인증샷을 찍었다.
백록담에서 내려오는 길은 정말 일품이다.
한눈에 보이는 제주시내와 멋들어진 가을하늘과 하얗게 흘러가기도 하고 멈추기도 한 구름과 그 위를 유영하는 한라산의 기운을 품은 가을바람이 누추한 얼굴까지 환하게 만드는 힘을 겸하고 있다.
지난주부터 오른쪽 등줄기가 아프더니 오른 팔까지 아파서 도수치료를 하고, 월요일까지 침을 맞았다.
마음은 멀쩡한데 컨디션이 불량한 것인지, 유난히 힘든 산행이다.
컨디션을 핑게대기엔 좀 비겁하고, 나이를 핑계로 들이대자니 자존심이 인정하질 않는 이것이 무엇일까?
나이를 어쩔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하고 컨디션이 불량했음도 인정하기로 하자.
이유야 어찌되었든지, 큰 결심을 했으니..
"오늘 날짜로 한라산 졸업"이다.
정말 다시는 못 오를 것 같다.
내려오는 길은 펄펄 날았는데, 오를 때 싱싱하던 재승이가 지쳤다.
어린이답게 한 번에 힘을 다 써버린 탓이다.
한라산은 여전히 웅장하고 멋들어지고 변함없이 그곳에 자리를 지킨다.
나야 졸업을 하든지말든지 눈도 꿈뻑이지 않을 것이지만....
혹시 나를 기다려주는건 아닐까??
이런....
고칠 수 없는 병입니다.
글로리아펜션과 비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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