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다.
어수선한 세월이지만 그 세월 속에서도 시간이 지나고, 계절이 바뀌고 이름 붙은 날은 어김없다.
코로나로 인해 고향으로 가지 말고 집에만 있으라는 말은 5일을 내리 빨갛게 써진 숫자 앞에 의미없다.
먹고살기에 바빠 묶인 삶들을 풀어헤치고 잠시 느슨해지는 여유를 부려볼 시간이기도 하다.
고향으로 향하는 대신 제주도로 강원도로 향하는 발길은 횡재가 아니었을까.
내가 며느리의 입장이어도 그랬을 거 같다.
명절 때 마다 어머님이 고생하신다는 며느리와 아들들이 이번 추석에는 밖으로 나가자는 제안을 한건 지난 설에 나온 이야기다.
설과 추석, 명절에 다 같이 모이는 자리이고 평소와는 다른 음식을 만들어 교제를 하는 날이기도 하다.
직장생활에, 육아에 힘든 며느리들이 명절이라는 이유로 시댁에 와서 썰고 지지고 부치고 볶고 하는 수고를 한다는 건 나도 싫은 일이었고 그런 일들이 결국 명절증후군을 탄생시켰음을 명확하게 알고 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지만 나는 며느리들이 명절에 스트레스 받는 것이 싫다. (물론 본인들 생각은 모른다)
모처럼 만나는 자리에서 같이 웃고 같이 즐겼으면 싶다.
그래서 명절이면 혼자 완벽하게 준비를 해놓는다.
일을 마치고 혼자 커피잔을 기울이다 보면 아이들이 도착한다.
며느리 입장에선 그게 또한 부담인가 보다.
"어머님 혼자서 다하시니 너무 힘드시다. 그러니 다음부턴 밖에 나가서 편안하게 지내자"라고...
내 입장에서는 혼자 일하는 것이 힘든 게 아니고 아이들과 함께 여행할 수 있다는 것이 좋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세현이가 곤지암 리조트 로열을 예약했다는 소식은 긴 장마 속에서 무덥던 여름날이다.
추석이 가까워지자 코로나로 인해 생활 속 거리두기에 철저하라는 상부의 명령은 나에게도 부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행하자'라고 우긴 건 당연히 나였음을..
추석 전날, 화담숲에서 10시에 만나기로 하고 간단한 간식을 준비했다.
명절이라고 해서 손을 놓고 있는 것이 처음이어서 어색하기만 하다.
약식을 만들고 샌드위치와 계란, 고구마와 호박을 삶고 과일도 준비했다.
맛있게 먹을 아이들을 생각하니 추석이 더없이 즐거워진다.
9시 반에 도착을 하여 기다리니 인아네가 도착을 하고 지유네가 도착을 한다.
미리 예약해둔 세현이 덕분에 곤돌라를 타고 올라가 화담숲 산책을 시작했다.
10월부터는 예약제로 입장할 수 있다고 하니 예약을 기억하자.
명품의 소나무가 아름답게 뻗어가고 계절에 맞는 꽃들이 화사하게 가을볕에 머문다.
인아가 엄마와 아빠, 작은엄마 아빠를 밀어내고 할아버지 할머니, 지유와 함께 산책을 하잔다.
인아의 손짓 하나와 발걸음 하나, 웃음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지유는 언니 바라기가 되었다.
땅에 떨어진 도토리를 줍고, 기어가는 개미를 따라가고, 부러진 나뭇가지 하나에도 깔깔대며 웃으며 놀잇감을 만드는 것에 내가 놀란다.
둘이서 노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으로 우리 마음엔 이미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의 뜻이 충만하다.
'정답게 속삭인다'는 화담숲의 의미에 맞게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손녀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정답게 웃으며 오늘을 즐길 아들들의 가정, 그 모습을 감사히 바라보는 우리 부부에게도 화담숲은 평안과 감사를 느끼게 한다.
저녁엔 바비큐를 하기로 해서 느티나무라는 곳에서 고기를 구웠다.
겨울이면 스키장으로 활용하는 곳인데 바베큐장으로 훌륭하게 변신되어 있다.
불과 집게와 가위와 장갑을 제공하고 우리는 고기와 야채를 준비해 가면 된다.
며칠 전 세현이가 즉포상을 받았다고 성금을 보냈길래 통 크게 소고기 등심과 남편을 위해 돼지 목살을 준비했다.
주현이가 고기를 굽고 세현이는 사진을 찍고 남편은 아이들을 돌보고 우리는 간단히 식탁을 준비했다.
금방 구워져 나오는 고기는 싸늘한 가을 저녁 바람이 살갗에 닿듯이 혓바닥에 닿는가 싶더니 녹는다.
배를 채운 인아는 지유를 데리고 넓고 푸른 잔디밭을 뛰논다. 얼마나 신이 나고 즐거워 보이는지.
잘 먹고 잘 놀고 리조트로 들어오는 현관에서
"인아 지유야 할머니랑 목욕하자" 고 하니 신발을 내팽개치고 달려온다.
신이 난 아이들 뒤에서 들리는 더 신이 나고 행복한 며느리들의 목소리가 청량하다.
"좋다 좋다 너무 좋다. 손을 씻기고 목욕을 시키지 않으니 정말 좋다"
며느리들이 좋은만치 나는 행복하다.
추석을 이렇게 세련되고 멋지게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