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오름
속밭
사라오름 전망대
선흘곶 쌈밥정식
2년전 추석에 서방과 같이 사라오름엘 갔었다.
한라산의 날씨는 그때나 지금이나, 어제나 오늘이나, 오전이나 오후에나 믿을 수 없이 변덕스럽다.
헐떡거리며 올라간 사라오름엔 안개가 가득하게 내려앉아 호수를 덮고 있어 한치 앞도 내다볼 수가 없었다.
1시간을 기다려도 안개는 걷힐 줄 모르고 안개속의 나는 서늘한 한기를 느꼈었고, 기다리다 지쳐서 내려오는 길엔 비가 슬금거리고 내려 입고 갔던 옷이 젖었던 기억이 새롭다.
지난 봄, 서방과 백록담엘 다녀오면서 오른쪽으로 이어진 사라오름엘 들리자고 하니, "죽어도 못간다"며 배를 내미는 서방앞에서 쉽게 포기했던 것도 백록담을 오른 다리가 생각처럼 가볍지만은 않은 탓이기도 했었다.
진에어를 이용하다 보니 마일리지가 조금씩 쌓여간다.
11월 2일이 지나면 10점이 소멸된다는 소식에 가을의 남벽분기점을 생각했는데, 올 들어 두번이나 다녀온 남벽이니 지난번 보지 못한 사라오름이 갑자기 보고싶어 견딜 수가 없더라는 이야기다.
남매들과 제주도에 다녀온지 10일만에 다시 제주행 티켓을 예매하는 것이 좀 미안하긴 했지만, 소멸될 마일리지(물론 점수는 말 안함)를 핑게와 당일치기란 말로 당당하게 예매하고야 말았다는 것이다.
다른 약속이 미뤄졌다며 동행하겠다는 선집사님과 함께 렌트카를 예약하고나니 어느새 월요일 새벽이다.
제주도엘 가면 새벽이든 밤이든 김포공항까지 픽업하던 서방이 달라졌다. 빌미의 제공은 나에게서 부터이다.
지난번 남매들의 여행 때, 7시 비행기를 타면 남양주에서 4시 40분 공항버스를 타면 시간이 맞춤하다는 이유로 버스를 탔더니 이젠 으레히 새벽버스를 탈 것이라 믿고, 버스정류장까지만 픽업을 해준다.
돌아오는 길도 마찬가지여서 어느 때이건 상관없이 공항으로 달려오던 서방이 피곤하다는 이유로 버스로 오라며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린다. 역시 길들이기 나름이다. 급후회..
제주공항에 도착하여 렌트카를 찾아 성판악에 도착하니 10시,
준비체조를 하고 화장실을 다녀오고, 부족한 카페인을 충전하고 성판악을 들어서니 10시 10분이다.
성판악을 들어서자마자 향긋한 한라산 특유의 향기와 맑은 공기, 조용하고 맑으며 정다운 한라산이 나를 맞이한다.
미치도록 좋은 기분이어서 옆에 선 선집사를 껴안고 한바탕 소리를 지르고서야 산행을 시작한다.
사라오름까지의 길은 특별히 어려운 길이 아니고 데크가 반 정도를 차지한다.
평평하고 조용한 데크 길을 걸으며 주위를 돌아보니 적당히 물들어가는 단풍과 바스락 거리는 낙엽이 가을이 깊어감을 알린다.
지난 해, 선집사와 영숙이와 걸었던 천아숲길과 영락없이 닮아 있어서 함께하지 못한 영숙이 이야길 꺼내보기도 한다.
1시간을 걸으니 속밭이 나오고 대피소에서 쉬려던 마음 앞에, 공사 중인 속밭대피소가 상처 입은 영혼처럼 널브러져 있다.
속밭대피소를 지나 다시 1시간을 걸으며 한라산의 매력에 빠지다보니 어느새 사라오름 입구에 서 있다.
사라오름까지의 길은 계단으로 이어진 오르막이다.
몇 구비의 계단을 꺾어 들어가니 지난번에 보여주지 않던 산정호수가 맑은 모습으로 가을과 함께온 나를 반가이 맞이한다.
물이 많이 줄어 들었지만 맑고 깨끗한 물 아래로 화산석의 작은 알갱이들이 단풍처럼 붉은 빛을 띠며 물 속에서 우리를 내다보고 호수를 둘러싼 나무들은 이름도 모를 앙증 맞은 열매를 달고 있다.
한라산 중턱에 그림처럼 들어 앉아 있는 사라오름의 산정호수,
호수를 돌아 전망대에 오르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가을을 즐기고 한라산을 느끼며 사라오름을 음미하는 중이다.
준비해온 김밥과 컵 라면을 먹는데 역시 컵 라면은 한라산에서 먹어야 제 맛이다.
둘이서 세 줄의 김밥과 컵 라면 두개를 헉헉대며 먹는 것도 모자라, 가지고 온 젤리까지 먹어치운다.
식사를 하고나니 따뜻한 나무자리가 따뜻하여 드러눕지 않을 수가 없다.
여기저기 쓰러지듯이 누운 사람들처럼, 안방인 듯, 거실인 듯 드러누웠다.
따뜻한 햇살과 포만감을 느끼는 뱃속, 나른한 오후의 한낮을 한라산 중턱에서 낮잠으로 즐기다니...
바람이 불어오는 느낌에 눈을 뜨니 30분이 휙 지났고, 코를 골았느냐는 질문에 선집사가 그렇다고 하니... 참 나...
꿀잠은 언제 어디서나 자야하는 것이다.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꿀잠, 그것도 한라산에서라니...
2시간 정도를 쉬다가 다시 하산하여 내려오는 길은 올라가는 길보다 단풍이 곱지 않다.
어느 때나 마찬가지로 한라산은 내려오는 길이 멀고 더디고 힘이 들다는 사실을 나는 인정한다.
2시간을 걸어서 내려온 성판악에서 역시 카페인을 보충하고 쌈밥을 먹자는 의견으로 선흘곶이라는 쌈밥전문집을 향하여 아반떼가 굴러가는데 염치없는 하품이 입을 가릴 순간도 없어 운전하는 선집사에게 미안해진다.
'선흘곶'이란 식당은 고등어구이와 제주돼지고기와 제주에서 나오는 나물과 채소가 정갈하게 차려진 한 상이다.
밥은 먹고 싶은대로 먹어도 된다는 손으로 쓴 글씨가 푸근한 인정처럼 정답다.
점심에 먹은 김밥과 라면과 젤리가 소화되지 않은 뱃속이지만 꾸역꾸역 들어가는 기이한 현상이 나를 비만에서 탈출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분명하다.
선집사가 저녁을 쏜다며 계산을 마치고 공항으로 돌아오는 길에 렌트카를 반납하고 검색대를 통과하니 시간이 안성맞춤이다.
제주도의 밤과 서울의 밤을 이어주는 진에어를 타고 공항에 내려 빠르게 움직인 덕분에 10시 버스를 10시 5분에 타고오는 행운도 누렸다.
시간이 없으면 당일치기 백록담도 가능한 세상이다.
꿈에 그리던 사라오름을 당일치기로 다녀오며 환갑의 갑질은 여기쯤에서 끝내야겠다는 현실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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