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역
김혜진 / 웅진 지식하우스
..너무 어리지도, 너무 늙지도 않는 나.. 내겐 아직 너무 많은 날들이 남아 있다(p.177)
그런 남자가 캐리어 하나를 끈채로 중앙역 광장에 들어서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그 남자 '나'에 대한 설명은 아무것도 없다.
고향이 어디이며, 이름이 무엇이며, 나이가 몇인지도 설명하지 않은채 광장의 삶으로 이끌어 들인 작가의 섬세함은
마치 잘 짜여진 스웨터와 목도리, 장갑까지 세트로 맞추어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는 완벽함처럼 소설은 완벽하게 그려졌다. 물론 한계가 분명한 내 지식으로는...
소설은 광장의 삶, 노속자의 일상을 덜함도 더함도 없이 그려내고 있다.
광장으로 들어온 나는 때로 아닌척, 일반 노숙자들과는 다르다는 모습으로, 그리함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고 해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광장의 삶에 익숙해진다.
밤이면 소음을 피하고, 비를 피하고, 밤이슬을 피하여 조금이라도 깊은 잠에 들어가기 위하여 박스를 구하고, 자리를 찾아헤매이고, 아침이면 노숙자들을 위하여 교회나 봉사단체에서 제공하는 밥 한끼를 얻어먹기 위하여 긴 줄의 끝에 서서 기다리기도 하며 어느새 일상은 너무나 익숙해져 일자리를 찾아 광장을 떠나려는 생각조차도 접는다.
그런 남자에게 슬리퍼를 끌고 반바지 차림으로, 복수가 찬 배를 안은 '늙은 여자'가 쥐를 무서워하며, 추위를 녹이기 위하여 따뜻한 체온을 얻기 위하여 남자의 잠자리로 파고든다.
하룻밤을 자고 일어난 후 여자는 남자의 전 재산이 들어있는 캐리어를 훔쳐 달아나고, 남자는 여자의 배반에 대한 분노로 여자를 찾아나선다.
며칠 후 만난 여자는 캐리어를 잃어버리고 대신 남자에게 자신의 몸을 허락한다.
깡통과 패트병이 뒹굴고 밤새 나뭇잎들이 내려다보고 들고양이가 지나고 먼지가 드나드는 공원의 한적한 곳에서 늙은 여자와 젊지도 늙지도 못한 남자는 비루한 사랑의 행위를 나눈다.
한끼의 식사비도 없는, 쪽방조차 넘볼 수 없는 지지리 가난한 그들이 기댈 곳은 사람이며 또한 가당찮아(?) 보이는 사랑이었을까? 남자와 여자는 서로의 몸을 탐하며 굳이 사랑이라 표현하지 않는 지독한 열병같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복수가 차올라 숨을 헐떡거리며, 고통에 잠을 들지 못하는 중에도 그들은 서로를 원하며 서로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정부가 지원하는 센터에서 병원으로 보내어도 돌아오는 여자와 새로운 일자리를 주어도 견디지 못하고 다시 광장으로 돌아오는 남자는 사랑이 전부가 아니라 이미 익숙한 '자유'와 '포기'일는지도 모른다.
여자는 나를 살아 있게 하고, 계속 살게 하고, 살고 싶게 만들었다.(p184)
남자는 여자의 부재를 견디지 못하고 괴로워하며, 수급자의 조건을 갖추기 위하여 남편과 중학생 아이 둘이 있는 여자의 집을 찾아가면서도 어쩌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여자의 행방에 조급해하며, 요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여자를 광장의 구석구석을 돌며 기다리기도 한다.
이것이 사랑이라면 정말 몹쓸 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요양병원에 있던 여자가 다시 광장으로 찾아들고, 일을 한다는 조건으로 미리 수당을 받은 남자는 센터의 도움으로 쪽방에서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지만 여자의 병은 깊어만 간다.
결국 손을 쓸 수 없게된 여자를 응급실에 들이밀며 자신의 마음 한곳을 차지했던 말을 기어히 하고야 만다.
이 모든게 여자 때문이다.
저당 잡힌 내 미래를 생각하고 여자에게 쏟아내고 싶은 원망의 말들을 웅얼거리기도 한다.
그때 여자를 내버려두었더라면 후회하기도 한다.
어떻게 되고 싶다거나 어떻게 하고 싶다는 생각도 없이, 결국엔 모든 게 제대로 되지 않을거라고,
바라는대로 이뤄지지 않을 거라고 체념하면서 그 모든 탓을 여자에게 돌린다.(p.288)
돈이 없는 이에게 응급실은 생명이 우선이 아님을 맞닥뜨리는 순간,
응급실 침대에 누인 여자곁에 있던 남자는 병원에서 계산을 하지 않고 침대를 사용한다고 하자
모르는 사람입니다.
정말 몰라요. 전 모르는 사람이라고요.
몰라요. 난 몰라요. 모른다고요!(p.295)
라며 병원을 빠져나오는 남자를 탓하기에는 눈앞에 현실을 감당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여자를 보낸 남자는 희망을 잃지 않음으로 이 소설이 절망적으로 끝나지 않고
아직은 우리에게 희망이, 살아갈 마음이 남아 있음을 나타내주어 나를 안도하게 한다.
나는 함부로 낙관하지 않고 서둘러 비판하는 대신 똑바로 서서 지금과 맞서는 법을 배울 것이다.
과거나 미래 따위는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지금 서 있는 자리에 뿌리를 박는 법을 터득할 것이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보고 쥐고 만질 것이다.
오늘은 반드시 이곳을 말끔히 청소해야 한다. 나는 그것만 생각한다.
멀리 역사의 간판이 반짝인다.(p.298)
김혜진,
'딸에 대하여'란 책을 읽고 인상에 남았는데.. 역시 좋은 글을 써서 좋다.
앞으로 그녀의 팬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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