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지독하게 더웠던 지난 여름엔 두번 다시는 가을이 오지 않을 것 같았는데, 어김없이 계절은 자기자리를 찾는다.
그래서 우리는 더운 날들도 견디고 추운 날들도 인내하며 살아간다.
짧은 순간 같은 봄과 가을을 기억하기 위하여 선물인듯 축복인듯 잠시 주어지는 가을을 즐길 수 있는만큼,
가질 수 있는만큼 가질 수 있기를 욕심한다.
한국의 가을은 명품이라는 말씀처럼 명품의 계절탓으로 10월의 주말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을만치 스케쥴이 꽉 들어찼다.
주말마다 결혼식이 두어건씩 대기중이고 체육대회니, 동기회니까지 합세를 해서 기다리니 잘 고르고 골라야 한다.
결혼식도 중요하고 동기회도 중요하고 체육회도 중요한데, 새생명주일을 하루앞둔 교회의 전도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주제에 또 도망치듯이 외면하며 1년에 한번 치루어지는 마로니에 백일장을 찾기로 했다.
입상을 포기한건 이미 오래전이고 그저 내가 존재하는 이유를, 여전히 나는 '나'인채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찾아보고 싶었다.
메마르고 휑한 마음밭은 이미 씨앗을 뿌려도 싹을 틔우지 못하고 꽃을 피우지 못하고 더우기 열매를 맺지도 못할 황폐함인줄 알기에 말랑거리고 달콤한 단어들을 끄집어내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기 때문이다.
몸이 좋지 않다는 동생도 다른 일들을 미루고 아픈 몸을 치켜세워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으로 향했다.
대학로로 들어서는 순간, 모든 길이 마비되어 있고 자동차는 이쪽으로 저쪽으로 길게 늘어선채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자유아트홀에 종일 주차를 하고 둘이서 마로니에 공원에 도착을 하니 이미 시제가 주어지고 여기저기에서 원고지를 마주하고 볼펜을 굴리며 생각속에 든 단어와 문장들을 끄집어내는 모습이, 역시 백일장의 모습이다.
나이가 들어도 모두가 소녀의 모습으로 갸웃거리는 모습속에 우리도 자연스럽게 끼어들어본다.
딸, 뱃지, 가로등, 세탁소가 시제로 정해져 있다.
동생은 딸을 주제로, 나는 뱃지를 주제로 써내려가는데 어느 때보다 글이 잘 써지는 날이다. 물론 혼자만의 생각에... ㅋㅋ
동생이 원고지 16매를 나는 14매를 마무리하고 어제까지만해도 그늘을 찾았는데 간밤에 가을바람이 몸살을 앓아 쌀쌀해진 탓으로 가을볕을 찾아 돗자리를 깔고 준비한 도시락을 풀었다.
한약을 먹는 동생이 밀가루를 못먹고 이것도 참고 저것도 건너뛰어야 한약의 효과가 있다는 사실에 둘이 같이 좋아하는 찰밥에 풋고추무침과 호박볶음과 고추와멸치와 마늘을 함께 넣어 조린 것과 열무김치를 꺼내고 먹으니 식당에서 먹는 것보다 맛있다.
문학주간이라 여러가지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져 대학로를 한바퀴 돌며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오랫만에 가족이니 뭐니 잊은채로 우리만의 시간을 즐긴다.
시상식을 기다리는 동안 무명의 가수들이 노래를 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손뼉도 치고 따라서 불러보기도 한다.
입상을 기대하지 않았다고하면서도 이름을 부르는 순간 긴장이 되는건 오늘따라 좀 잘써진 글 탓일까? ㅋㅋ
아이들이 어릴적 두 아들들이 행여나 길을 잃어버릴까봐 마음졸이며 글을 쓰던 그 날들이 떠오른다.
더 정확히는 2번이나 입상한 영광스러운 그날들이 눈물겹게 그리워진다.
상금도 다섯배나 올랐는데... ㅠㅠ
공통적으로 젊은 여자들이 입상을 하는 것을 보니 역시 많이 배우고 노력한 탓이리라...
백일장에도 선생님을 모시고와서 1차 심사를 하는 모습들은 백일장의 의미를 가리는 것 같아서 좀 언짢아진다.
동아제약에서 주관하는 만치 박카스와 음료수, 그리고 비타민씨를 받아든채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가을이 깊어지는 만치 우리자매의 인생의 깊이도 조금 더 아름답게 깊어지고 고운 단풍처럼 물들어가고 있었으니
감사할 일이고 내년 한국의 명품가을도 감사한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