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에 대한 나의 가장 첫 기억은...
초등학교 1학년때의 소풍길이었던것 같다.
오빠는 6학년, 작은언니는 3학년, 그리고 나는 1학년이었다.
처음가는 소풍이기도 했고 가난한 시골에서 돈이라고는 구경도 하지 못한 그때,
오빠가 내 몫까지 챙겨갔었던가 보다.
소풍간 곳에서 오빠가 눈깔사탕을 하나 사주던 기억이 아스라히 남아있다.
그 후의 늦가을쯤, 겨우내 먹을 김장을 준비하던 때, 뒷밭에서 배추와 무우를 거두어 들일 때였다.
오빠와 언니가 무우를 깎아서 먹으면서 나는 주질 않고 자기네끼리만 먹고 있었다.
무우를 먹고싶던 나도 칼을 들고는 무우를 깎기 시작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어설프고 굼뜨고 어딘가 모자란 나는 하얀 무우 대신에 왼손 검지손가락이 시작되는 부분을 칼로 탁 치고 말았다.
시커멓게 솟아나던 피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며 허옇게 뼈가 드러난 자리에 상아뼈를 갈아서 발라주던 엄마는 오빠와 언니를 심하게 야단치셨던 기억이다.
아직도 왼손엔 대각선의 칼자국이 선명한 모양으로 지난간 세월위로 오빠와 언니의 동생에 대한 부족한 사랑을 대신해 주고 있다. ㅋ
큰오빠보다는 훨씬 다정다감한 작은오빠,
차라리 없으면 좋을 것 같았던 큰오빠와는 상대적으로 자상하고 친절했던 오빠였기에 우리는 큰오빠보다는 작은 오빠를 좋아하고 따른다.
그런 작은오빠가 어느새 회갑을 맞이했다.
요즘이야 회갑이라 말하기도 부끄럽지만 이미 장성한 자녀들이 아빠의 회갑을 맞아서 고모들과 함께 식사자리를 마련했다.
일산에 있는 미채한정식. 오후 3시부터 6시까지 예약을 하고는 약도까지 카톡으로 보내온 조카들이 그저 대견하기만 하다.
신한은행 본점에서 근무하는 큰조카 정해는 어릴적부터 유난히 아빠를 따랐고 오빠도 정해라면 끔찍히 이뻐하기도 한다.
작은조카 선해, 태어나자마자 나와 꼭 닮았기 때문에 '네 엄마가 고모를 미워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대기도 했다.
나는 아버지의 막내동생인 고모를 심하게 닮아서 어릴적 동네에서 어른들이 모두 고모와 너무 똑같다고 했는데
지금은 선해를 보고 나와 똑같다고 한마디씩 한다.
그리고 늦둥이 규락이,
유난히 아들타령을 하던 오빠는 남동생이 없는 사실로도 불만이었는데 어쩌자고 딸만 내리 둘을 낳았다.
그리고도 모자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검사하고 검사하고.. 결국 정해와는 17년이나 차이가 나는 규락이를 낳았다.
처음에는 엄마가 아기를 가졌다는 사실도 창피해하던 정해와 선해가 늦둥이 남동생을 얼마나 이뻐하는지,
마치 엄마가 아들을 보듯.. 그렇게 이뻐하고 챙긴다.
시골에는 알리지 않고 서울에 있는 식구들이 모여 식사를 했다.
모처럼 주현이와 민아까지 참석해서 좋았는데 많은 조카들이 참석하지 못해서 아쉽기만 하다.
초등학교 교사인 진태는 아이들을 인솔하여 훈련으로, 서아는 다문화가족을 위해 일하느라 가끔 나가야 하는 토요일의 근무로,
세현이는 당직으로, 대학원 1학기를 마치고 있는 준경이는 하필 오늘 시험으로, 군대에 있는 준후는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작은언니네와 우리가족, 역시 휴일 당직이라 교체도 어려운 선서방을 빼고 동생이 모이니 13명이 모였다.
오빠 회갑을 축하하며 며칠전에 준비한 현수막을 내걸고 식사를 하니 즐겁고 기쁘다.
'회갑'이라니 어쩐지 서글프다는 오빠의 말을 듣지만 여기까지 건강한 몸으로 왔으니 앞으로도 건강하길 바래는 마음은 모두가 한결같기만 하다.
정해와 선해가 좋은 배필을 만나서 아름다운 가정을 꾸렸으면 좋겠다.
미채한정식은 얼마전 아침프로에 소개되었던 음식점이다.
긴 대나무에 오리, 칠면조, 닭, 문어, 전복, 소라, 삼겹살 등등이 들어차고 불에서 구워져서 요리되어 나와서 기름기가 쏙 빠져서 웰빙타령을 하는 현대인에게 참 좋다.
곳곳에 제철을 맞아서 피어있는 예쁜 꽃들이 우리마음을 하나로 묶어준다.
식사를 마치고 풍산동으로 가서 커피와 맥주를 나누며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왔다.
오빠가 더욱 건강하고 가정에 소원들이 이루어지길 기도하며..
생신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