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나들목을 들어오니 바로 포도밭이다.
제비꽃 이현숙씨^^*
큰오빠,
어렸을 적부터 큰오빠를 좋아하지 않았다.
한번도 큰오빠라는 존재가 따뜻한 사랑으로 다가오지 못한건 어쩌면 내게 치유되어야 할 제목중의 하나인지도 모른다.
7남매중 유난히 병치레가 잦았던 나는 오빠와 언니와 동생들보다 학업성적이 늘 쳐졌었다. 특히 산수는 더했고..
큰오빠로부터 시작된 남매들은 시골 작은학교에서 늘 우등생이었고 성적이 남달랐지만 나는 늘 남다르지 못한채 그저 나머지 공부나 免하는 수준이었다.
매월 시험을 치르고 90점이상의 우등생을 전교생 500명이 모인 자리에서 상장을 수여할 때, 언니 오빠들이 과목마다(국어, 산수)들이 줄줄이 불려나갈 때, 나만 국어 과목때만 불려나간 정도였으니..
나이차가 많은 오빠는 일찍 서울생활로 갔다.
오랫만에 집으로 오는 오빠는 비단구두 대신 늘 숙제검사를 했고 교과서 검사를 했다. 배운데까지 문제를 풀게하고(정확히 말하면 시험을 출제했다) 이미 배운것을 제대로 풀지 못한다는 이유로 가차없이 체벌이 가해졌다.
오빠가 군대에 가고 보름간의 휴가를 나올때는 나는 공포에 질리곤 했다.
어느 때부턴가 자신있는 데까지만 배웠다고 거짓말도 할 줄 알게 되었다.
아버지에게 매를 �은 기억은 다섯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지만 큰오빠에게 맞은 매는 셀수도 없고 강도 또한 거칠었으니 결코 오빠가 좋을리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뿐인가,
한겨울 밤에 손과 발의 청결함을 검사한 적도 많았다.
목욕탕도 없는 시골에 일주일에 한번 머리 감는 것이 전부였으니 손과 발에 새까만 때가 끼이는 것은 어쩔수가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오빠는 캄캄한 밤에 어린 동생들을 얼음이 꽁꽁 언 냇가로 내몰았다.
얼음을 깨고 돌을 줏어 손과 발을 밀어대는 모습은 정말 딱하기만 하다.
새빨간 손을 호호 불면서 다시 호롱불 아래에서 검사를 받은 후에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봄이면 친구들이 다래끼를 들고 산으로 나물하러 가곤 했지만 오빠는 어림도 없었다. 봄나물하러 가는 친구들이 얼마나 부러웠던지..
난 어릴적부터 소꿉놀이를 아주 좋아했다.
각종 사금파리를 줏어다 이쁘게 장독대를 만들고 부엌을 만들고 찬장을 꾸미며 반찬을 하고 밥을 짓는 일을 좋아했다.
내가 좀 지나쳤는지 중학생이 되어서 소꿉놀이를 하다가 오빠에게 반쯤 죽을뻔 했고 이후로 소꿉놀이는 내게서 영원히 떠났다.
그런 오빠가 무서워 남자친구는 생각지도 못했고 같은 반 남자 아이들과도 이야기를 나누지 못할 정도였으니..
그런저런 이유로 난 오빠가 버겁고 무섭고 싫었다.
오빠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모두 갚아주리라.. 다짐까지 했었다.
그런 오빠가 환갑을 맞았다.
세월을 이기지 못한 탓인지, 이젠 늙어가는 모습을 보인다.
아직도 작은 오빠처럼 벽을 느끼지 않고 다가가지지 않는 것은 이린날의 기억탓인지, 장남이라는 막중한 타이틀 탓인지 모르겠다.
조카들이 장성하여 아버지의 환갑을 맞아 친가와 외갓집 식구들을 초대하여 같이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고 아버지의 양복까지 말쑥하게 차려 드리는 모습을 보니 어느새 오빠도 늙었고 나도 늙어가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빠와 나와의 거리는 아직도 멀기만 하다.
환갑을 맞으신 오빠, 오래도록 건강하시고 행복한 가정을 이끌어 가시길 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