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느릿느릿한 모습으로, 아슴아슴하게 단풍이 들기 시작하고, 오늘은 이 구석에서, 내일은 저 나무에서 빨갛고 노란 단풍이 물들어가는 모습을 보리라 여긴 가을이었는데,
화려하고 고운 가을날의 정취를 마음껏 느끼며 흡입기로 빨아들이듯이 내 속으로 빨아들이고 싶었는데, 어느새 낙엽이다.
많은 비로 인하여 나무와 풀들이 제 구실을 못했다고는 하지만 채 단풍이 여물기 전에 수북하게 쌓인 낙엽은 배신감을 느끼게 한다.
아름다운 가을을 만나기 전에, 쓸쓸한 가을을 만나야 하는 일..
나의 게으름인지, 자연의 변화가 이런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학교에서 도서관과 기숙사에만 틀어박혀 공부를 하자니 갑갑하고 힘이 쓸데가 없어지며 계절이 어떻게 변하는지 모르겠다며 세현이가 함께 등산을 하자고 전화를 걸어왔을 때, 늘사랑산악회의 천마산행도, 불우이웃돕기 티켓도 이미 포기한채 아들과의 산행에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냉동실에 얼려둔 떡을 꺼내고, 선물로 받은 알 굵은 머루포도를 씻고, 택배로 곱게 보내주신 밤을 삶고 얼려둔 얼음물을 꺼내고, 추석에 동생이 선물한 사과까지 씻고, 커피까지 준비하고 보니 어느새 나는 소풍을 앞둔 소녀로 돌아간다.
토요일아침에 도착한 세현이와 세현이가 다닌 중학교 뒤에 있는 달뫼산(월산리)으로 향했다.
달뫼산은 오밀조밀한 산책길처럼 낮으막한 능선길이라 도란거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데이트 하기엔 안성맞춤이다.
달뫼산 참숯가마는 문을 닫은지 오래이고, 커다란 건물과 마당엔 소국들만이 하염없는 모습으로 소복하게 피어있다.
넓은 마당에 차를 세우고 배낭을 맨채로 산행을 시작했다.
지난여름, 태풍이 심하던 날, 달뫼산의 커다란 나무들이 대책없이 쓰러진 것을 보았는데 사람이 뜸한 산이어서인지 아직도 쓰러진 나무는 길을 가로막고 누워있다.
능선에 오르니 서울과 춘천을 오가는 고속도로 사이로 문호리와 수입리, 찻집과 음식점 그리고 모텔이 즐비한 동네가 북한강을 사이에 두고 보인다.
그리고 우리가 오른 산길 아래는 경춘국도가 한가로운 주말오후를 나른한 모습으로 졸고 있다.
얕으막한 산을 40분을 가다보니 정상이라는 팻말이 허접한 모습으로 서 있다.
환경사업소 가는 길과 금남리 가는 표지가 정상과 어울리지 않게 요란하게 세워져 있기도 하고..
잠시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셀카놀이를 하는 세현이를 바라보니 그저 이쁘기만 하다. ^^*
지난번 교회산행팀과 왔을 때 목적지까지 다가가니 금남저수지로 향하는 길이 예쁘게 이어져 있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내려가보자는 의견일치로 저수지입구까지 내려가니 금남리의 시작이며 낯익은 동네가 보인다.
고요한 산길에 사람을 만나는 일은 무서운 일이지만 세현이가 있으니 전혀 무섭지가 않다.
산에서 만난 아저씨가 영지버섯과 느타리버섯을 따서는 냄새를 맡아보라고 한다.
느타리버섯은 아무래도 수상쩍다며 미련없이 버리고 잘 익은 영지버섯만 배낭에 담는 아저씨에게 사과 한쪽과 머루포도 몇알을 드렸더니 아주 고마워하신다.
"고등학생 자제분과 오셨군요"라는 말에 "군대 다녀온 대학생이예요"라고..
우리집 아들들이 童顔이라 군대 다녀온 후에도 주민등록증을 제시당하는 일이 많단다.(나를 닮았나? ㅋㅋ)
되돌아오는 길은 오르막이다.
일주일동안 산행을 하지 않았더니 헉헉거리며 숨이 막히고 다리는 후덜덜이다.
20대 초반의 세현이는 펄펄 날아오르는데, 그 엄마는 절절 맨다. ㅉㅉ
"세현아, 이담에 효도관광이라고 해외여행 티켓만 선물하는 것 보다는 뒷산이라도 너랑 함께하는 것이 나는 가장 행복한 것이다. 알았지?" 라고 일침을 가함으로 이후에도 엄마와의 산행은 효도의 한부분임을 일깨우고,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은근히 세뇌시킴으로 내 품안에 품으려는 욕심을 슬쩍 엿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