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훈
1963년 전남 여수
초등학교 5학년쯤인가,
친구들과 소를 먹이러 가는 것이 내게는 얼마나 큰 즐거움이었던지 모른다.
학교가 끝나면 동네아이들과 함께 소를 몰고 나와서 뒷산으로 향하던 발길,
여름햇볕은 지글지글거리며 계곡의 돌들마져 달군 후라이팬처럼 뜨겁게 했지만
계곡곁의 여름나무는 무성한 잎으로 달구어진 돌들을 식혀 놓고 나를 기다리곤 했다.
가족이 많은 집이라 별도의 방이 없던 나는 산 위에서 나만의 방을 만들고 그 방안에서 낮잠도 즐기고 책도 읽으며 산수숙제도 하고 동시도 외우며 구구단을 외우고 찬송가가 없었지만 외운 찬송가를 목청껏 부르기도 했었다.
비가 내리고 나면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있던 돌들로 만들어졌던 그 작은 방..
그립다. 유년의 때가..
잊혀진 유년시절의 어느 아름다운 기억과의 만남처럼 반갑고 유쾌한 만남이다.
처음 한창훈의 소설 '홍합'을 읽고난 후, 단번에 그의 팬이 되어버렸으니..
내노라하는 문학상의 수상작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하며 그의 작품의 영역을 넓혀가는 모습을 보며 머잖은 날에 큼직한 문학상을 거머쥘 그를 기다린다.
한창훈은 바다의 사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소설 대부분이 바다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고 오히려 바다에 대해 아둔한 나는 그의 소설을 읽으며 바다를 알아가는 기쁨도 얻는다.
푸른물결이 시간따라 넘실거리고 어느 순간에 포말로 부셔지는 파도, 그리고 하얀 백사장이 내가 아는 바다이지만 한창훈은 그 모든것들과 함께 뒹굴며 껴안으며 울며 웃는 이웃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더함도 덜함도 없는 진솔함으로 내놓는다.
'나는 여기가 좋다'에는 8편의 단편소설이 실려있다.
'나는~~'과 '아버지와 아들'은 이미 두어번 읽은 내용이지만 읽을수록 감질나고 마음속에 따뜻한 무언가가 차고오름을 즐기며 다시 읽었다.
바다에서 태어나 오로지 바다밖에 모르는 남자와 그런 남자와 결혼한 여자는 한사코 바다를 떠나려고 한다. 무슨 방법을 쓰든지 자식들을 육지로 내보내는 것이 바다사람들의 목표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배를 갖기 위하여 청년시절부터 뱃일을 하고, 장성한 어느 날 자신의 배를 갖고 만선의 기쁨에 겨워하며 가족들앞에 나타날 꿈을 꾸며 살아가는 바다의 남자들.. 배를 가지는 것이 부자의 상징이던 뱃사람들에게 어느때부턴가 "놀면 손해가, 움직이면 손해가 되었다가 가지고 있으면 있을수록 손해"가 되는 상황을 맞이함으로 배를 팔지 않을 수 없고, 그 후의 삶을 감당하기 싫음으로, 그 이전의 모든 삶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듯이 뭍으로 나가려는 여자앞에서 남자는 '나는 여기가 좋다'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을 보며, 과연 바다가 좋아서인지, 뭍에서의 삶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는 아닐지.
'밤눈'은 옛애인을 생각하며 자신의 사랑은 성공했노라며, 유부남인 그는 지금도 어디에선가 자신의 가족을 부양하며 일상을 살아가지만 마음속에는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이 남았음으로 끝까지 성공한 사랑이라 나직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주점의 여자와 손님의 대화가 이어지는 가운데도 밤새 하얀 눈이 소복하게 내린다는 내용이다.
'올 라인 네코' 는 육지에서 빚을 갚지 못한 다방여자 미정이 바닷가 다방으로 팔려가면서 악착같이 돈을 벌어 빚을 청산하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바다에 발을 들여놓았고 끝없이 구애하는 용철을 사랑하고 용철과의 하룻밤을 지낸 아침, 다방으로 돌아오는 미정앞에 '성매매특별법'이 내려진 경찰에게 잡혀 풀려나오는 과정을 나타낸 글이다.
파출소에 붙잡힌 미정앞에 나타난 용철에 대한 신뢰보다는 영철이 자신을 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감까지 나타내 주고 있다.
특히 취조하는 경찰에 대한 표현이 재미있어 즐겁기조차 하다.
'면담 겸 교육, 교육 겸 훈시, 훈시 겸 내사, 내사 겸 취조, 취조 겸 인물감상..'
(p.79) 뭐라 말할 수 없이 안성맞춤인 표현이 아닌가!!
'바람이 전하는 말', '가장 가벼운 생', '섬에서 자전거 타기', '삼도노인회 제주 여행기', '아버지와 아들'...
모두가 잔잔한 감동을 주고 의미를 주는 내용이지만 그중에서 '삼도노인회 제주 여행기'는 유쾌하고 즐겁다. 혼자서 킬킬거리며 웃느라 정신이 없을 정도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이전의 내용과는 달리, 뭍으로 밀어내는 아버지와 바다로 돌아오는 아들의 이야기이다.
군에서 제대한 아들은 육지보다는 바다가 좋아 고향으로 돌아와 그들과 섞이기 위하여 축구를 하고 외삼촌과 장래를 이야기하며 밤새 술을 마시고 새벽에 돌아와 아버지의 속을 뒤집어 놓는다.
당장 바다에 나가야 할 아버지가 댓병을 내어놓으며 주발가득히 술을 따르고는
"애비가 못나서 야단만 치고 술 한잔을 못따라줬구나. 사과하는 의미에서 그동안 못 따라준 거 한꺼번에 준 것이니 너도 한꺼번에 쭈욱 마셔라"며 기선을 제압한다.
잘못했노라고 빌줄 알았던 아들이 주발 가득 부어진 소주를 마시고 자신도 아버지에게 주발가득 찰랑거리게 소주를 따룬다.
"저도 솔직히, 진심으로 아부지한테 술 한잔 못 올렸습니다. 사과드리는 의미에서 한잔 올릴라요"..
기가 막힌 아버지 역시 술을 마시고 다시 부어라 마셔라로 댓병의 소주를 부자가 마신다.
몇십년을 배를 탄 아버지는 아침부터 마신 술로 인하여 배를 타는것 조차 버겁고
젊은 아들은 아버지 대신 큼직한 도미를 낚아올린다.
아버지의 마음을 이미 알고 잇는 아들과 아들을 위하여 신새벽을 깨우는 아버지의 모습.. 그것이 가족이 아니겠는지.
단 한 페이지도 그냥 넘기기 아까운 글들, 딱 맞춤하게 비유한 유쾌한 비유들..
책을 읽는 내내 즐거운 마음이다.
특유의 전라도 사투리 또한 정감이 느껴진다.
많은 사람들에게 권하고픈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