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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대게가 맛있다는데 우리 영덕대게 먹으러 가자"
뜬금없이 신랑이 내뱉었다.
오랫만에 네 식구가 모여 닭을 뜯는 자리였을까?
텔레비젼의 채널을 서로 차지하겠다고 이리저리 팔 싸움을 하던 자리였을까?
오랫만에 네 식구가 모여 고스톱을 치던 자리였을까?
방학을 맞아 집으로 온 주현이와, 입대를 이유로 모든 알바를 내려놓은 세현이와 빨갛게 그려진 삼일절까지.. 온통 흐뭇한 풍경을 느끼며 신랑이 한 말이다.
주현이가 중2가 되던 여름, 이제부터 여름휴가를 같이 가지 않겠다는 말을 질풍노도의 시기에 들어선 자신이 이미 대학생이나 된듯한 우쭐거림으로, 사춘기를 막 시작한 그때부터 가족간의 여행은 늘 한 사람이 부족한 여행이었다.
주현이가 있으면 세현이가 시험으로, 세현이가 있으면 주현이가 군대로..
이래저래 아들을 둔 부모는 일찍 이별을 겪어야 한다고 서로에게 위로를 하며 둘만의 시간을 즐겼던지라 모처럼의 가족여행은 나를 들뜨게 했다.
영덕으로 목적지를 정하고 며칠이 지나니 은근히 거리가 마음에 걸린다.
영천에서도 두어시간을 더 가야하고, 마티즈를 이용하자니 먼 길에 네식구가 불편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고, 카렌스를 이용하려면 신랑이 혼자서 운전해야겠기에 아무래도 무리가 따를 것이고..
그렇다고 1박을 하고오자니 다음날이 주일이고....
아무래도 영덕은 멀다는 이유로 속초로 목적지를 바꾸었다.
2월 28일, 4년만에 한번씩 찾아든다는 2월 29일을 이야기하다가 세현이가 잊은 물건을 찾듯이 이야기한다.
"방학 끝났으니 형도 대전에 데려다줘야 하는데 우리 서해안으로 가자, 오는 길에 형을 내려주고 오면 아빠가 두번 걸음하지 않아도 되는거잖아"..
매사에 치밀하고 수학선생인 세현이다운 생각이다.
급히 방향을 돌리고나니 내가 바빠진다.
주현이에게 보낼 반찬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다.
3월1일 아침 7시30분,
방학이라 늦잠을 자던 녀석들이 부지런을 떨고 각자의 짐을 챙겨 출발을 했다.
오랫만에 넷이서 떠나는 여행이라 이야기들이 많다.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들, 장황하고 과장된 나의 처녀시절의 이야기..
'내가 얼마나 야무지고 얼마나 부지런하고 얼마나 알뜰하고 얼마나 예뻤고 얼마나 착했고 얼마나 효녀였는지..또한 얼마나 마음이 비단결이었는지..
아빠를 만나기전 내가 얼마나 인기가 많았었으며 아빠는 나를 만나기전 얼마나 별볼일 없었는지를..ㅋㅋ'
몇번을 들었던 말들이지만 아이들은 재밌어하고, 어디가 거짓말이고 어디가 허풍인지를 눈치채기도 하고 나의 희망사항이었음까지도 알아채린다.
말을 들으면서 킬킬대고 웃기도 하고 가끔 나를 향해 눈을 흘기기도 하고 가끔 남자들끼리 은밀하게 눈짓을 주고받으며 나를 비웃기도 하고 가끔 놀라기도 하며 되묻기도 한다.
아침을 굶은 뱃속에 준비해온 커피와 녹차와 과자들을 우겨넣으며 서해안휴게소로 향했다. 길이 막히지 않아서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다.
주현이와 세현이가 가 튀김우동 네 그릇을 들고 오는걸 보며 이제 아들들이 다컸구나..싶어 내심 흐뭇하다.
우동은 어쩐지 오뎅이 들어간 음식같아서 난 우동을 먹질 않았다.
지난번 엄마생신때 영천에 가면서 처음 먹어본 우동은 그런대로 맛이 있었기에 거절하지 않고 우동그릇을 받았더니 맛이 너무 느끼하다.
홍성IC를 빠져서 안면도로 향했다.
기름유출 때문에 모두가 봉사를 하는데 우리만 여유롭게 놀러간건 아닐까 싶어 내심 캥기기도 했지만 서해안으로 와서 음식을 먹어주는 것도 돕는 일이라는 말을 들었기에 이또한 서해안의 어민들을 돕는 일이리라 생각하기로 했다.
처음으로 보는 서해안,
안면에서 시작한 해안도로는 기름띠와는 상관없다는 듯이 맑고 푸르다.
우리를 반기듯이 하얀 파도가 밀려왔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고, 뒤를 이은 다른 파도가 다시 하얀 포말을 입에 문채로 다가든다.
밧개해수욕장에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고 바다내음을 맡아본다.
물새가 한가롭게 쉬고 소라들의 긴 발자국들이 그림을 그린듯이 새겨져 있다.
백사장과 자갈들이 어쩐지 세수를 못한 듯이 처연한 모습을 보니 기름으로 인한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음이 피부로 느껴진다.
다시 해안도로를 달리니 계속하여 파란바다가 이어진다.
꽃지해수욕장엘 도착하니 많은 사람들이 바다를 바라보며 사진을 찍는 모습이다.
여러모양의 바위에 올라가기도 하고 아름다운 꽃지해수욕장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어본다.
세 남자가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물수제비를 뜨기 시작한다.
강물과 달라서 파도가 드나들기 때문에 물수제비 뜨기가 만만치 않다.
관건은 던질 돌인 모양이다.
세 남자가 하나라도 더 뜨기 위하여 돌을 찾기 위해서 난리가 났다.
아무리 잘 던지고 아무리 좋은 돌이라도 3개이상은 불가능하다.
모처럼 동심으로 돌아간 남자들의 모습을 보며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처럼 마음속에서 샘같은 기쁨이 부서진다.
방포항으로 가서 광어회를 주문하는데 아줌마가 자꾸만 음식을 강요한다.
은근히 기분이 나빠진다. 먹고 싶은 것을 먹을만치 주문하는데 옆에서 강요를 하는건 여행의 즐거움을 방해하는 것이라 영 마뜩찮다.
점심을 먹고 차에 오르니 도적처럼 슬금슬금 잠이 밀려온다.
눈을 비비다가, 억지로 뜨다가, 말을 해보다가 어느순간 까무룩한 잠속으로 들어간다. 잠시 자고 눈을 뜨니 차 안은 온통 한밤중이고 신랑만 혼자 운전중이다. 급 미안해진다.
홍성에서 다시 유성으로 오는데 세시간이 걸렸다.
주현이 자취방으로 와서 오래 비워두었던 방을 정리하고, 겨울이불을 걷어내고 밀린 반찬을 정리하고 새로운 반찬으로 냉장고를 채우고 부엌을 정리하고 나니 오후가 깊어져 저녁시간으로 이어진다.
두달을 같이 지내다 혼자 남는 주현일 보니 마음이 짠~~하다.
그런 형이 안쓰러운지 세현이가 자꾸 뒤를 돌아다본다.
하나씩 불이 밝혀지는 길을 따라 집으로 오는 길은 아침에 품었던 설렘과 봄바다를 보고난 충만함과 건강한 가족이 곁에 있음에 대한 행복함과 이 모든 것을 넘치지도 않고 모자람도 없이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공기속에 스민 봄향기처럼 내 마음에 가득하게 차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