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모습이대로..

아버지에게 갔었어

여디디아 2021. 4. 19. 11:22

작은아버지 묘

 

아들들의 이름은 옆면에 ..  
환타를 좋아하시던 아버지, 밥 대신 막걸리로 끼니를 대신했던 엄마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친정에 갈 일도 없어졌다.

큰오빠만 영천에 계시지만 이미 며느리와 사위까지 얻었으니 굳이 친정이라고 찾게 되지 않는다.

 

부모님 산소에 자주 들러야지 하면서도  그 또한 쉽지 않다.

다녀오려면 꼬박 하루는 걸리는 먼 곳기도 하고, 이미 돌아가신 부모님이라 소홀한 면도 없지 않다.

지난가을부터 '산소에 한번 가자'고 입으로만 말하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갑자기 신랑이랑 출발했다.

갑작스러운 결정이라 아무 준비도 없이 나섰다가 다이소에서 조화를 준비하고 산소 앞에서 막걸리와 환타를 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40년이 되었지만 늘 눈물이 나를 온몸을 지배한다.

아버지와 대화한번 제대로 나누지 못한 일,

마지막으로 서울에 오셨을 때 아버진 이별을 위한 인사를 나누기 위함이셨다.

 

혼자 자취하는 나의 자취방에서 하룻밤을 아버지와 함께 잔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신혼의 오빠가 사는 집에서 자취방까지는 걸어서도 10분 거리에 있었고, 통근버스가 오빠네 집 앞에 있었다.

아버지가 오셨다고 오빠네서 밥을 먹는데 아버지 말씀이

"옥이 혼자 있으니 아침에 출근 준비해서 오빠네 와서 밥 먹고 출근하고

 퇴근 때에도 오빠네서 밥 먹고 집에가서 자거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올케언니는 시아버지 앞에서 소리나지 않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고,

아버지 말씀에 오빠는 목에 가시가 걸린 것 같았을 것이다.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을 나는 아버지의 그 한마디가 딸에 대한 아버지 사랑이 내 속에 높은 산을 만들어 지금껏

나를 지켰음을 안다.

아버지 앞에서 늘 어린 딸이었던 내가 얼마나 안쓰러우셨을까, 자식을 길러본 지금에야 안다.

 

아버지와 함께 잠을 자던 밤,

잠결에 이불깃을 여미어 주시던 아버지의 모습을 못 본 체 하며 자던 잠을 이어 잤다.

작은 아침밥상에 고등어를 굽고 소고기 반근을 사다가 불고기를 했는데

"고등어만 있으면 되지 고기는 와샀노?"라시던 아버지,

마침 월급날이라 월급봉투를 아버지께 드렸더니

"고생했다"며 돌려주시던 아버지께 어쩌면 차비를 드렸는지 어쨌는지 기억이 없다.

그것이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아버지께 차려 드린 가난한 밥상일 줄 알았으면 절대로 그렇게 가난하게 차리진 않았을 텐데.

 

이맘때쯤이었을게다.

아모레에서 매월 발행하는 '향장'이라는 책자가 있다.

5월 어버이달을 앞두고 수필을 보냈더니 턱~하니 당선되어 향장지에 사진과 함께 '어버이 은혜'란 제목으로 내 수필이 실렸었다.

상금이 있었는지, 상품이 있었는지 역시 기억에 없다.

아버지가 향장 지를 머리맡에 두시고 오가는 사람들을 불러

"우리 셋째 딸이 책에 나왔다"라고 자랑을 하셨다고 한다.

얼마나 큰 기쁨이었을까.

여름휴가가 되면 아버지께 달려가  칭찬을 받아야지 기다리는 중에 참지 못한 아버지가 탈장으로 수술 중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어릴 적 교회가 들어서고 청춘들이 기회를 틈타 교회에 다니며 '연애'를 하고 동네가 시끄러워지자 우리 남매들에게도

"국민학교 졸업과 동시에 교회 졸업"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동네에서 비교적 공부를 잘하던 남매들은 아버지 명령에 순종하여 국민학교 졸업과 함께 교회 졸업을 했지만 가장 공부 못한 나만 거역하고 살금살금 교회를 다녔었다.

내가 교회에 가고 나면 아버지가 뒷방으로 오셔서 문을 걸어 잠그고. 아버지가 잠근 문을 엄마가 살며시 와서 풀어놓았던 그때, 나는 하나님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무엇을 알기나 했을까.

 

서울에 있던 큰언니가 결혼을 하고 작은오빠가 군대를 가고, 이어서 내가 서울로 왔다.

작은언니와 내 생일이 이틀 간격이며 겨울이라 아버지가 엄마가 해주신 찰밥을 삼베보자기에 묶어서 오셨었다. 

차조가 찹쌀보다 많이 섞인 밥이 보자기에 눌어붙을까 봐 콩고물을 묻혀서 아버지가 서울까지 가지고 오셨다.  

그때 대담하게 성경책을 가지고 대광교회에 가는 나를 향하여 

"우리 옥이처럼 하면 교회 다녀도 된다"는 말씀에 얼마나 감사하고 놀랐던지.

이후 시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도 아버지의 말씀이 힘이 되었음을 안다. 

 

봄이면 지게 한가득 진달래를 꺾어다 주시며 딸들이 교실로 가지고 갈 수 있게 하시던 아버지, 

비가 내리면 새농민 책을 찢어서 어린 세 딸에게 종이배를 만들어 주시던 아버지,

여름이면 주전자를 들게 하고 냇가에서 고기를 잡으셨던 아버지,

늘 문 앞에 앉으셔서 자식들의 소식을 오매불망 기다리시던 아버지,

진갑이라 자식들이 제주도 여행을 가시라고 했지만 큰아들의 치아를 걱정하시며 미루시던 아버지  

 

며칠 전 신경숙의 '아버지에게 갔었어'를 읽으며 자식 사랑이 유별나시던 아버지를 생각했다.

아버지의 비석 앞에 서니 아버지와 시간을 함께하지 못했던 일이, 아버지께 약 한번 사드리지 못했던 어리석음이, 맛있는 음식 한번 차려드리지 못한 후회가, 어리다는 이유로 모든 게 용서될 줄 알았던 회한이 눈물로 흘러내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의 모자람을 탓하지 않으시며 나를 불태우면서도 자식들을 지키려는 아버지의 형형하던 눈빛이 그립기만 하다.

 

 

 

 

  

 

 

 

'내모습이대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플란다스의 개  (0) 2021.07.21
북한강 자전거길 천마산역~평내호평역  (0) 2021.05.17
생일입니다  (0) 2021.03.04
인아와 1박2일  (0) 2021.02.23
신축년 삼행시  (0) 2021.0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