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
신달자 에세이
(민 음 사)
몇년전인가,
마로니에 백일장에서 코스모스처럼 한들거리는 어여쁜 시인을 만났다. 백일장 심사위원으로 나온 그녀는 이뻤고 아름다웠다.
잠자리 날개 같은 스카프를 가느다란 목에 매달고,
마로니에 공원에서 구구이 먹이를 쪼아대는 비둘기와 같은 색의 바바리를 걸치고 세련된 화장을 하고 세련된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을 하던, 천상 여자인 신달자선생을 뵌적이 있다.
평생 손에 물을 묻혀보질 않은것 같고, 화장실에 가서 볼일을 볼 것 같지도 않고, 입에서 단내나는 말도 해본것 같질 않고 큰소리 한번 내어보지 않은것 같은 여자,
마음에 악을 간직하지 않았을 것 같고 욕이란 가당치도 않았을 것 같은 그런 순하고 약하고, 부잣집 딸 같은 그런 분...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는 제목을 보고 시인인 그녀가 마흔에 배운 생의 걸음마는 도대체 어떤 것일까.. 궁금했다.
책을 손에 쥔 순간부터 나는 마음이 후둘거리고 심장이 콩닥거렸다.
눈에 보였던 신달자 선생님이 이런 고단하고 힘겨운 생을 살아내셨다니.. 믿기질 않았다.
숙명여대 심현성교수..
1977년 5월 11일 식탁에서 뇌졸증으로 쓰러진 그를 받아 안는 순간 그녀는 그의 운명을 받아 안았다고 한다.
24년간 반신불구로, 육신의 불구와 정신적인 불구가 그녀를 놓아주지 않고 한번에 꽁꽁 묶어버린다.
23일간의 혼수상태와 이어지는 긴긴 시간들,
마비된 사지를 일으키려는 일념으로 마른수건으로 멍이 들도록 주물러 대는 일, 하루에 두번씩 목욕을 시키는 일, 수만가지의 약재를 구하고 약을 달이고 먹이는 일,
이 병원에서 다른 병원으로 옮겨다니며 문병객들과의 지리한 만남속에서 스스로를 지키며 남편을 지키려는 자존심,
세상물정을 몰라 반값에 팔아넘긴 집이며, 남편을 일으키기 위하여 총장님댁을 드나들며 자신을 낮추며 꺼이꺼이 울어가던 일..
소리나지 않는 총이 있으면 망설임없이 쏘아 버리고 싶었다던 그 마음을 경험하지 못한 내가 어찌 알 수가 있을까.
내 남편이 아니고 또한 내가 당하는 일이 아니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을 감당한 그녀의 지독히 외롭고 힘겨운 삶의 일상들이 새록새록 담겨져 있다.
24년간 남편이 집에서 병원으로, 병원에서 다시 집으로 장기환자로 살아가는가 했더니 덜컥 시어머니마져 쓰러졌다.
9년간을 누운채 살아있던, 살아있음에도 죽은 시어머니의 병치레까지 치러내야 했던 고단하고 핍절한 삶을 어찌 알 수가 있을까.
남편의 병간호로 인하여 몸도 마음도 피폐해진 그녀는 결국 종교의 힘을 빌린다.
울지 않으려 애쓰던 모든 자존심도 버린채 성당에서 강같은 눈물을 흘린 그녀는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 놓는다.
남편이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 재기에 성공함으로(물론 온전치는 않았지만) 그녀는 삶에 대한 감사가 넘쳐났다. 그녀를 살게 해준 가장 큰 힘은 어린 세딸이었다고 고백한다.
'우리가 부모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살아야 할 가장 큰 힘'이라는 말 속에 그녀의 삶에의 끈을 놓치지 않은 이유를 본다.
'천국이란 있어야 할 사람이 다 있는 곳'이라며 가정의 소중함과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게 한다.
무심한 하나님은 그런 그녀를 다시 시험하신다.
남편이 죽고 혼자만의 삶을 살아가는 그녀에게 유방암이란 진단이 내려지고 수술까지 받게 된다.
진단을 받은 후, 전화기를 손에 든채 누구에게도 전화할 수 없는 사실을 확인한 그녀의 외로움..
아침에 일어나 사소한 말 한마디로 대화를 나누고픈 간절한 그리움, 다시 아내의 자리로 돌아가 일상의 사소한 행복을 누리고픈 평범한 여자.
그러나 당당히 자신의 이름을 앞세우며 후학들을 위하여 열심히 강의하는 그녀의 모습이 참으로 존경스럽다.
어렵고 힘든 삶에도 포기하지 않고 박사학위를 취득하여 대학에서 문학을 강연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나는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더 이상 몸도 마음도 아프지 않고 건강한 몸으로 오래오래 행복하셨으면.. 간절한 마음으로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