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봄 길

여디디아 2008. 4. 7.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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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더디오는 봄을 앉아서 기다리자니 조급한 마음이 나를 허둥대게 만든다.

1년을 걸어온 들길을 오르내리며 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날마다 눈을 두리번거리게 만들고 발을 헛딛게 만든다.

내게 주어진 1시간은 덜함도 더함도 없는 60분이라는, 잘 짜맞춘 틀처럼 정확하여 12시에서 1시 사이의 시간을 숨가쁘게 하건만 남들에게 주어진 1시간은 60분이 아닌 180분쯤으로 흐드러진 시간처럼 보이는건 내 판단이 잘못되었음인가.

 

처음의 목적은 살을 빼기 위함이었고, 30도를 오르내리는 땡볕에도,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깡추위에도 묵묵히 걸었건만 요지부동인 몸무게가 민망스러워 이제는 건강을 위해서..라는 거창한 명목으로 걷기 시작한지가 1년을 넘어섰다.  

 

어김없이 찾아든 점심시간,

'토요일인데 하루 쉬지요..'

'퇴근할 때 걸어서 갈 것이니 오늘은 쉬지..'

 

흔들리지 않는 것은 유혹이 아니라고 했나.

달착지근한 유혹, 가뭇없는 나뭇가지처럼 흔들린채로 주저앉아 버릴까.

일주일 내내 걸었고 퇴근후 걸어서 갈텐데 오늘은 쉴까..

유혹은 설탕발린 사탕처럼 내 몸속을 누비고 봄바람처럼 정신을 혼미케 한다.

 

어쩐지 오늘은 여유롭게 걷고 싶다.

오가며 만났던 아줌마들의 느린 걸음처럼 호기를 부리며 걸어보고 싶다.

쫓기듯이 걸었던 논길과 들길에 눈길을 보내고 새순을 돋아내는 작은 풀들에게 눈을 맞추고 싶다.

여린 나뭇가지를 흔들어 보고, 고향처럼 부드럽고 포근한 흙의 감촉을 발바닥에 느껴보고 싶다.

발이 닿기가 무섭게 다시 떼어놓던 발걸음을 오늘은 느직하게 땅에 붙여보고 싶다.

운동이 아닌 봄을 느끼는 산책이고 싶어 달착지근한 유혹을 뿌리치며 길을 나섰다.

 

겨우내내 빈 들판의 모습으로 침묵하던 논과 밭이 새로운 생명을 받아내기 위하여 갈아 엎어 보드라운 속살들을 드러내어 봄바람을 맞이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새롭게 시작할 계절들이 질서정연하게 보인다.

남쪽에선 이미 만개한 진달래가,  이제서야 붉은 입술을 앙다문채 봄볕이 핥아주길 기다리고 있다.

어릴적 지게 가득히 진달래를 꺾어다 주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앙다문 꽃잎위로 그리움처럼 쏟아진다.

낯익은 풀들이 쏙쏙 얼굴을 내밀고 얕은 산비탈에 햇님이 고개를 내민다.

어릴적 우린 '햇님'이라 불렀는데 여기선 홑잎이라 불리운다.

봄의 따사로운 햇님을 받아 가장 먼저 나물로 나오는 잎이라 '햇님'이라 이름 붙여졌나 보다. 

'햇님'이란 이름이 정다워 끝까지 햇님이라 고집한다.

 

가장 먼저 피어난 산수유가 노란 빛으로 봄날을 어지럽힌다.

산수유꽃을 보면 나른한 오수처럼 여겨져 나는 자꾸 졸리워온다. 산수유만 보면 잠이 오니 큰일이다.

이름모를 풀들과 낯익은 풀들과 꽃들을 보며 걷노라니 시간 가는줄 모르겠다.

 

퇴근,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은 나는 봄날의 공기처럼 가볍다.     

종이컵 가득히 커피를 담은채 퇴근길을 나섰다.

봄빛이 쏟아지는 거리를 걸어보고팠던 간절한 소망을 스스로 이뤄내는 충만함,

햇볕이 내리 꽂히는 곳에 활짝핀 개나리와 반쯤핀 진달래,

어느날 어느때건 도도한 자태를 드러내는 흰목련,

봄날의 주말은 나른한 아름다움과 게으른 평화를 가져오고 사람들은 무심함으로 또는 설레임으로

각자의 길을 간다.

 

며칠앞으로 다가온 국회의원 선거일 탓에 봄길은 온통 시끌벅적하다.

곳곳에 나붙은 현수막과 마이크에서 울리는 소음같은 소리들,

그런 무질서와 시끄러움속에서도 나는 봄을 맞이하고 봄을 느낀다.

 

묶여진 시간들, 얽매인 시간들,  틀에 갇힌 것처럼 빈틈없는 시간들, 토요일 오후는 일순간 모든걸 파괴한다.

자유롭게 흩어진 시간들,

봄바람처럼 자유로운 든든한 다리,

발길에 채이는 돌부리조차 용서가 되는 이 지독한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걸까.

 

여전히 봄햇살은 공평하게 공급되고,

여전히 봄바람은 바지속을 스며 온몸에 스멀거리고

여전히 내 콧노래는 흥얼흥얼거리고..

눈이 닿는 곳마다 사람보다 아름다운 꽃들이 나를 기다리듯이 피어있는 봄 길,

1년동안 훈련된 두 다리는 지칠줄 모른채 걷고 또 걷는다.

 

봄을 향하여,

봄 속으로..    

봄 길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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