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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강에서

여디디아 2005. 2. 21. 15:15
 

    

                     북한강에서



휴가철이다.

산으로 바다로 떠나는 사람들의 발길은 46번 경춘국도를 몸살나게 만든다.

밀고 밀리는 차량들의 행렬을 보니, 무더운 날씨보다 휴가철이라는 사실이 먼저 떠오른다.

이른 새벽부터 출발하여 여기까지 오는 사람들의 설렘이 느껴지고 휴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나른한 평안함이 느껴지는 날들이다. 덕택에 퇴근후엔 꼼짝없이 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날들이다.

차를 몰아 10분을 달리면 언제든지 북한강의 푸른 물줄기를 만날 수 있고, 확 트인 강물을 바라보며 가뿐 숨을 고를 수 있어서 난 이곳이 참 마음에 든다.

처음 서울에서 이사를 올 때, 두 아들들을 이유로 전셋집 구하기가 어려웠고, 이미 얻은 전셋집에서도 주인집 눈치가 만만치 않아 아이들에게 떳떳하지 못함을 이유로 우린 이곳에다 작은 내 집을 마련했다.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갈 때쯤엔 서울에다 집을 마련하자는 약속을 굳게굳게 하며.

그렇게 살아온 날들이 벌써 15년이 되었고, 이사를 온 다음해부터 시작하여 지금껏 서울로 돌아가고픈 마음은 전혀 생기지 않은 채로 이곳에서의 생활은 우리를 만족하게 했다.

 가까이에 북한강이 우리를 향하여 열려있고, 주방에 들어서면 천마산이 하루도 어김없이 나를 기다리며 아침을 열어주는 곳, 봄이면 창문밖에 보이는 뒷동산에서 개나리와 진달래가 앞다투어 피어나고 여름이면 하얀 아카시아가 사방에서 향기를 들이미는 곳, 가을이면 또록한 알밤을 쉽게 만날 수 있는 곳, 겨울이면 하얀 눈이 봄까지 녹지 않고 잔설로 남아있는 곳...

 세련된 백화점의 쇼윈도우를 만나지 못해도 불만이 없고, 철마다 바꿔 입는 옷들이 유행에 뒤져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갈 수 있는 곳,

 그래서 이곳이 참 좋다.

 우리 부부에게는 남들보다 은밀한 즐거움이 있다.

맞벌이 부부로 살아가는 우리는 늘 바쁘다. 남편은 남편대로, 나는 나대로 늘 바쁜 생활이다. 주일이면 교회에서 하루를 보내고, 평일엔 집안 일과 직장 일 때문에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언제부턴가.

 주일 새벽이면 우리는 둘만의 시간을 만들기 시작했다.

일주일동안의 고단함을 이유로 주일만은 늦잠을 잘 수 있는 달콤한 유혹을 우리는 서로를 위해서 양보하기로 했다.

이른 새벽, 출근하는 날보다 일찍 일어나 우리는 북한강으로 향한다.

희븀한 안개가 북한강을 자북하게 뒤덮고 있는 시간, 우리는 북한강의 안개와 호명산 허리를 감아 도는 안개를 바라보며 우리만의 시간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북한강의 굽이굽이를 돌아서 우리가 서는 곳엔 밤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봄이면 개나리가 띄엄띄엄 피어있기도 하고, 여름이 오는 날엔 빨간 줄장미가 미리 피어있음으로 여름이 오고 있음을 깨우쳐주기도 하고, 가을이면 상수리 나무에서 도토리가 떨어지고 빈약한 밤나무에서 또록한 알밤을 떨어트리기도 한다.

항상 같은 자리에 차를 세우고 남편과 나는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더듬거리며 쏟아 놓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빼놓지 않은 것은 동전을 넣어서 꺼내는 자판기의 커피이다.

자동판매기의 커피에 대장균이 득실거린다는 뉴스에도 우리는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습관처럼 석 잔의 커피를 뽑아든다.

 한 잔씩 마시기엔 커피의 양이 너무 작아서 늘 석 잔을 뽑아서 한잔 반씩 나누어 마신다.

 어느 날엔 남편이 주전자와 버너를 꺼내서 길가에 앉아 커피를 끓이기도 한다.

 여전히 석 잔의 커피를 끓여 한잔 반씩 나누어 마신다.

 종이컵을 만지작거리며, 식어가는 커피를 아껴가며 우리는 서로를 이야기한다.

 큰아들의 여자친구 이야기와 작은 아들의 구두쇠같은 인색함을..

아이들의 등록금을 걱정하고 학원비를 걱정하기도 하며, 자동차 보험료와 재산세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교회건축을 위한 건축헌금 이야기도 슬며시 꺼내보고 섭섭한 시부모님의 이야기도 미친 척 꺼내기도 한다.

 때로는 회사의 일 문제를 이야기하며 서로 도움을 주기도 하고, 어느 날엔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를 하며 하나님의 방법의 이해하지 못함을 나누기도 한다.

 커피 한잔의 여유는 우리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누리게 한다.

 기분 좋았던 이야기보다는 섭섭했던 이야기들, 어쩐지 서러웠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그 시간을 난 몹시도 사랑하며 아낀다.

가끔 유유히 헤엄치는 물오리들을 바라보며 가슴속 응어리를 헤엄치는 물오리의 뒷모습에 던져놓기도 하고, 가끔은 쪽배를 타고 물고기를 잡는 낚싯꾼들의 고단한 손길 속에 분노하는 마음을 실어놓기도 한다.

 나는 이 시간이 참으로 좋다.

 남들처럼 외국으로 여행을 갈 팔자는 아니지만, 철따라 옷을 바꿔 입고 가구를 바꾸는 팔자도 아니지만 난 그들이 조금도 부럽질 않다.

 주일아침이면 늦잠의 유혹에서 벗어나 커피 한잔 반의 여유를 느끼며 쌓인 이야기를 더듬더듬 풀어놓을 수 있는 시간이 참으로 좋다.

  물안개 가득한 북한강의 변하지 않는 모습처럼 우리 부부 또한 늘 같은 자리에 머물렀으면 좋겠다.

 봄이면 북한강을 가로질러 하얀 벚꽃이 난분분히 피었다 흩어지고, 여름 장마엔 황톳물이 북한강을 가득하게 덮고, 가득한 황톳물에 둥둥 떠내려온 쓰레기들이 나를 언짢게 하기도 하지만 황톳물마져 난 사랑한다.

 가을이면 칡넝쿨에서 노란 낙엽이 뒹굴어 북한강에서 배가 되어 흐르고 겨울이면 하얀 눈이 강을 뒤덮이는  북한강이 참으로 좋다.

 주일새벽이면 변함없이 우리를 붙들어 매는 커피자판기,

 커피 양이 푸짐해서 좋다는 남편과 커피 맛이 제일이라는 내가 활짝 웃으며 마주할 수 있는 곳, 어느새 이곳의 커피에 중독된 우리들.

 차 한잔의 여유가 우리 부부를 얼마나 신뢰하게 만들고,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는 여유를 만들어 주는지.

 우리가 일주일을 살아가는 시간들이 힘들고 고될 때가 많이 있지만 우리는 주일새벽녘에 만나는 북한강의 푸른 물줄기와 자판기에서 뽑아드는 석 잔의 커피로 인하여 충분히 행복하고 충분히 기쁠 수 있음이 또한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벌써부터 주일새벽이 기다려진다.

 돌아오는 주일엔 비라도 내렸으면 좋겠다.

 비가 내리는 북한강의 물줄기와 커피 향의 그윽한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